독백/영화

[Das Weisse Band]

아는사람 2010. 2. 7. 20:28


화이트 리본
감독 미카엘 하네케 (2009 / 오스트리아, 프랑스, 독일)
출연 마리사 그로왈트, 야니아 파우츠, 미카엘 크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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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리본Das Weisse Band]이란 영화제목을 처음 듣고 내가 떠올렸던 것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출신 지역이었다. 그는 독일 출신이고, 엄밀히 말하면 독일어권 국가인 오스트리아 출신(거기에서 주로 교육받고 자라난) 감독이다. 그렇다면 [하얀 리본]의 배경은? 이 역시 독일어권 국가인 독일이다. 즉, [하얀 리본]은 1900년대 초 독일의 한 자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담은 영화인 것이다. 

이러한 상관관계 속에서 나는 자연스레 세계 1차대전을 염두에 두게 되었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를 보기 전에 나는 충분한 사전정보를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고, 한동안은 이 영화가 세계 1차대전도 아니고 무려 세계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사회상을 소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내용을 담은 작품이리라 짐작했다. 팔에 하얀 리본이 묶인 채 눈물을 흘리는 소년의 모습이 담긴 [하얀 리본]의 포스터는 나에게 나치의 표징이 '하얀 리본'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역사에 정통하지 못한 자다운 발상을 하게끔 했다.

하얀 리본이 상징하는 바는 물론 나치즘이 아니다. 영화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바에 따르면 하얀 리본은 '순수'의 상징으로써, 목사 집안의 아이들이 잘못(부모들이 생각하기에 잘못으로 여겨질 만한 일)을 저지를 때 그들의 팔 내지는 머리에 묶여, 그들로 하여금 '순수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되새기게 한다. 이 하얀 리본은 그만큼 종교적인 장치인데, 이 종교적인 엄격함은 당연하게도 순혈주의적인 색채를 띠며, 이는 곧 극단적 민족주의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파시즘을 암시한다. '순수한 아리안 혈통'을 강조했던 나치즘과 하얀 리본 사이에 어떠한 연관이 있다면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실제로 오스트리아가 함락되고 전쟁이 벌어지는 등 당시 일어났던 일련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나레이션)이 나온다. 이 영화의 표면적인 맥락을 충실히 따라가 보면 그렇듯 제법 직설적인 메시지를 도출하는 것이 가능할뿐더러, 그러한 일이 정당하게 여겨진다. 그 특정한 시기, 그 특정하지 않은 자그마한 마을에서 감지할 수 있는 폭력성, 그 마을의 아이들이 받은 교육의 파시즘적 면모 등은 수많은 인간을 희생케 한 전쟁과 결코 무관치 않다는 것. 그러나 과연 하네케가 말하려 했던 것이 이러한 메시지뿐이었을까. 아니, 하네케가 애당초 시도한 것이 과연 '말하려는' 것뿐이었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기하학적이면서도 회화적인 대칭과 구도가 돋보이는 [하얀 리본] 속의 여러 장면에서 읽어낼 수 있다. 흑백 영상에 담긴 그 모든 장면은 숨이 막힐 듯한 긴장과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물론 이 아름다운 작품에서도 가학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곤 하는 하네케 감독은 어김없이 관객으로 하여금 그저 폭력을 방관하게 놔두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이 겪는 폭력의 체험은 때로는 클로즈업 쇼트로, 때로는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명징한 신음으로, 때로는 직설적인 것만큼이나 은유적인 피학자의 눈물로 관객을 엄습한다. 

몇 가지 기이한 폭력이 발생하고 난 다음 그 원인을 찾아 헤매는, 일종의 추리소설 구조를 지니는 이 영화는 히치콕이 [다이얼 M을 돌려라Dial M For Murder] 같은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서스펜스에 비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균일한 긴장을 이어가는 데 성공한다. 다만, 바로 그렇기에, 그러던 중 갑작스레 끝을 맺고 별다른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 [하얀 리본]의 열린 결말은 이 영화를 논할 때 가장 논쟁적인 대목이 될 수 있을 법도 하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작가의 불성실함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아쉬운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얀 리본]의 결말을 가늠하는 데에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도그빌Dogville]이 훌륭한 나침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도그빌]에는 인간 본성을 파헤치고 질문하는 주제의식 등 여러 면에서 [하얀 리본]과 유사한 지점이 있다. [도그빌]의 결말은 그렇다면 어떠한가. [도그빌]은 처음부터 끝까지 명징함을 잃지 않은 채 폭력으로 희생당한 주체로 하여금 폭력으로 복수할 수 있게끔('눈에는 눈, 이에는 이') 했다. 이를테면 확실한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하네케는 어떻게 했는가? 추리 가능했던 모든 사실과 사람들을, 무자비할 정도로 잔혹한 가해자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가해의 이유를 모호함의 영역에 넘긴 채, 거대한 역사 뒤로 숨어버렸다. 

[도그빌]은 그렇다면 [하얀 리본]보다 성공적인가? 그렇다, 즉각적으로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있어서는.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도그빌]의 확실한 결말이 '도그빌'이란 마을과 그 마을 사람들을 '확실히' 이해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고 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 통쾌한 결말은 사실상 통쾌함을 위한 통쾌함일 뿐,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자아내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그러한 맥락에서 [하얀 리본]의 다소 모호할뿐더러 싱겁기까지 한 결말은 논쟁적이긴 하지만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대목이 된다. 이미 존재 그 자체로, 과정 그 자체로 결말 이상의 것을 말하는 '죽음의 푸가'에 왜 거창한 피날레가 필요하겠는가! 

이 영화로 2009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이제 그 예술적 역량이 정점에 다다랐다고 평가할 수 있는 거장일 것이다. 그의 영화는 명료한 듯 명료하지 않으며, 가학적이지만 동시에 놀라울 만큼 서정적인 색채를 띤다. [하얀 리본]은 가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가혹해서, 어지간한 낙관주의자가 아닌 이상 온전히 견뎌내기 힘들 정도의 여파를 선사한다. 또한 그 여파가 도무지 작품만으로는 명료하게 매듭지어지지가 않고, 어떻게든 관객 스스로 그것을 끝맺어야만 한다는 점에서도 [하얀 리본]은 [퍼니 게임Funny Games], [피아니스트La Pianiste]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으로 일컬을 만하다.

그의 [퍼니 게임Funny Games]를 본 다음 미디어와 상업영화가 보여주는 폭력에 대해 비판적 자세를 견지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이듯, [하얀 리본] 역시 우리 안의 파시즘을 진지하게 성찰하게끔 자연스레 이끄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반응에 뒤따르는 물리적이고도 심미적인 감성은 그 어떠한 성찰로도 대체할 수 없는 소중한 미학적 체험일 것이다. 만약 하네케 감독의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담론만큼이나 그의 차기작에 대한 추측이 흥미로울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가 엄밀한 사상가임에 앞서 어디까지나 한 명의 예술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별점 : ★ (10/10)



* 이 글은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때 보고 남긴 감상을 뒤늦게 마무리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