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방문기

005.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 헌책방, 북카페, 청소년 문화공간

아는사람 2009. 1. 1. 10:43



 

상호 :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소 : 서울특별시 은평구 응암동 89-2 B1

규모 : 지하 1층. 작지만 무척 알찬 규모
홈페이지 : http://www.2sangbook.com/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하 [이상북])은 여러모로 이상한 공간입니다. '청소년 문화공간'이란 문구를 간판에 공공연히 집어넣었다는 점도 그렇지만, 헌책방인데도 딱히 헌책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낡은 책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도 조금 이상합니다. [이상북]이란 상호를 정하는 데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영향이 컸다고 주인 분께서 홈페이지에 밝힌 바 있지만,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란 표현을 확대해석해도 그 표현이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죠. 한국이란 곳이 청소년 따위, 헌 것(헌책) 따위, 느림(북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 따위 그리 개의치 않는 나라라는 점에서, 그러한 것을 상관하는 이 공간은 확실히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입니다.

제가 이곳에 꼭 한 번 찾아가야겠다는 마음을 지니게 된 것은 바로 이 헌책방의 홈페이지 덕분입니다. 헌책방에 책 판매가 목적이 아닌 책 이야기가 목적인 듯한 홈페이지가 있다는 사실부터 약간 신선하게 다가왔는데요. 깔끔한 배경 톤부터 시작해서, 멋진 사진, 그에 곁들여진 세심하고 담백한 글, 추천도서 목록과 상세하고 깊이 있는 서평, 북 아트 정보 등등 어느 면 하나 쉽사리 지나치기가 힘들 정도로 알찬 홈페이지였습니다. 그동안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책 가격을 은연중에 가장 중요시했던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끔 하는 글이 여러 개 있어서 깊이 반성해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이 헌책방의 주인 분이 책을 사랑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 좋았습니다.

다른 헌책방에서는 좀처럼 들지 않았던 "나중에 이런 헌책방을 운영하며 살면 좋겠다"는 생각도 이곳에서는 들더군요. 북카페에는 보통 흥밋거리 위주의 가벼운 책(혹은 재테크 관련 서적)만 있고, 헌책방에는 읽을 책이 많아도 편안히 읽을 장소가 없죠. [이상북]은 바로 그러한 각 장소의 단점을 보완해 만들어낸, 무거운 책도 많고 읽을 장소도 넉넉한 '올드북카페'입니다. 키스 자렛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편안한 소파에 앉아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이들이 있는 공간을 상상하시면 되겠죠.

원래 말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 헌책방을 방문할 때면 조용히 구경만 하고 나오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용기를 내서 주인분과 잠시 대화를 나누어보기도 했습니다. 둥근 테 안경과 긴 곱슬머리 덕분에 솔로로 활동하던 시기의 존 레논이 연상되는 분이었는데요, 존 레논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반가웠(?)습니다. 조용하고 차분히 저의 어수룩한 질문에 답해주셔서 고맙기도 했고요.

주인 분은 예전에도 출판업계처럼 책과 관련된 분야에서 주로 일하셨고, [이상북]을 꾸려나가시게 된 시기는 1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양질의 책만(혹은 제 마음에 드는 책만;) 있어서 직접 책을 다 모은 것이냐고 물어보았는데, 그렇다고 대답해주셨습니다. 90% 정도는 다 읽은 책이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권할 만한 책만 진열해놓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감탄스럽더군요. 실제로 홈페이지에는 보유도서 목록이 엑셀파일로 올라와있기도 합니다.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이 많았던 것이 기억에 남고, 한길사나 까치글방 같은 곳에서 나온 여러 고전서적을 비롯해 정말 다양한 분야의 서적이 고루 비치되어 있던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책은 음식과도 같기에 편식해서는 안 된다는 주인 분의 생각이 고스란히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청소년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는 이 공간에서는 아이들 시험공부도 함께 하고, 은평 씨앗학교 같은 대안학교 활동도 지원하고, 그 학생들이 만든 작품으로 전시회도 한다고 합니다. 일반 음악공연이나 글쓰기 강좌 장소로도 꽤 자주 사용되는 것 같고요. 서울 대안학교와 관련된 팸플릿도 진열되어 있어서 몇 장 받아왔는데요, 저 역시 한때 탈학교 학생이었기에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이러한 공간이 제가 사는 곳 근처에 있었더라면 더 현명하고 멋진 고민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생기더군요. 
 

헌책방 블로그를 시작하기 전에도 그랬지만,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 저는 헌책방이 그저 사라져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이상북]처럼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리고 기존의 헌책방과 견주어보았을 때 색다른 공간을 방문하며 어쩌면 헌책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재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옛 헌책방의 모습을 간직한 공간은 분명히 사라지고 있지만, 새로운 형태와 분위기를 지닌 [이상북] 같은 헌책방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 비록 그 숫자가 줄어드는 만큼 늘어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옛 추억만큼이나 소중한 추억을 이러한 공간에서 새롭게 얻어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헌책방 수가 줄어드는 게 그저 슬퍼하기만 할 일은 아니겠죠.


인생의 성공을 물질적인 척도로만 가르치는 이 국제적으로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에 [이상북] 같은 공간이 있다는 게 참 다행으로 여겨집니다. 제도권 교육에서 낙오되면 한없이 냉정해지는 사회 앞에서 외로워하는 탈학교 학생들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헌책을 사랑하나 사라져가는 헌책방 탓에 아쉬워하는 이들에게 새롭고 멋진 추억을 안겨주는 공간. 정형화된 사회에서 괴짜로 살아가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겠죠. 하지만 그 괴짜가 있기에 사회가 그나마 건강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상북]이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국내적으로 '이상한' 모습 그대로 자신의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