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영화

[The Ghost Writer]

아는사람 2010. 6. 14. 15:07


유령작가
감독 로만 폴란스키 (2010 / 프랑스, 독일, 영국)
출연 이완 맥그리거, 피어스 브로스넌, 킴 캐트롤, 올리비아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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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랭 역을 맡은 올리비아 윌리엄스)



(세 명의 인물. 비서, 아내, 그리고 '남자')



(유령 작가, 이완 맥그리거)


로만 폴란스키의 [유령 작가The Ghost Writer]는 감독의 손길이 잘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다. 그보다는 배우들, 원작 소설의 아우라가 더욱 확실히 감지된다. 어쩌면 이러한 것이 폴란스키 연출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감독이란 직업이 전체적인 조화, 개별 요소의 최적화를 이끌어내는 것임을 참작한다면, 늘 그랬듯 이 작품에서도 폴란스키가 매우 훌륭한 작업을 수행해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보통 국내로 수입되는 외국 영화 중에는 엉뚱하고 자극적인 코드로 홍보되는 작품이 적지 않은데, [유령 작가]는 그 예외로 볼 수 있다. 흥행 성적 같은 것을 제쳐놓고 순수하게 홍보 문구와 실제 영화 내용을 비교해보자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홍보된 작품으로 일컬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완 맥그리거, 피어스 브로스넌, 그리고 올리비아 윌리엄스가 서로 다른 얼굴의 측면을, 서로 다른 위치에서 보여주는 포스터 자체도 훌륭하고(이 포스터에 영화 한 편이 온전히 압축되어 있다), '스릴러의 거장'이나 '히치콕의 계보를 잇는'이란 수식도 적절하다. 히치콕의 스릴러처럼 적당히 위트 있고, 침착하게 고조시키며, 절묘하게 마무리 짓는 작품이기에.

로버트 해리스의 원작은 출간 당시부터 공공연하게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모델로 삼은 작품으로 회자되었다고 한다. 원작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영화 역시 그러한 면모에 제법 충실한 듯 보였다. 이 영화는 물론 대놓고 노골적인 정치 메시지를 던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수문학적인 지향성만 띠는 것 역시 아니다. 그 사이의 줄타기가 매우 절묘하게 이루어지는, 전형성에 기댄 비전형적인 비극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통쾌하지만, 그만큼 답답한 감정, 카타르시스로 일컫기에는 망설여지는 무엇인가를 매우 은밀히, 그러나 짜릿하게 불러일으키는 작품이랄까.

배우들을 지켜보는 재미도 굉장하다. 주연, 조연 가릴 것 없이 모두 훌륭하다는 감상이 들었다. 이완 맥그리거는 흡사 싸구려 소설책에 나오는 탐정 캐릭터 같은 '유령 작가'를 매우 잘 체현해냈고, 피어스 브로스넌도 이중적이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배우 출신 정치인의 모습을 정말 근사하게 연기해냈다. 킴 캐트럴은 미드 출신 배우가 종종 그렇듯 어떠한 고정된 자신의 이미지에서 주춤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사만다를 애써 부정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영화에 잘 적응한 듯 보였다(오히려 감독이 그러한 캐릭터 이미지를 영화 속에서 잘 활용해낸 듯 보였다). 그리고 영국 전 총리의 부인으로 나오는 올리비아 윌리엄스는 정말 매혹적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인간적으로 아름다운 것인지 내내 감탄하며 보았다...

알렉상드르 데스플라Alexandre Desplat의 음악도 좋았고, 전반적으로 꽤 괜찮은 영화였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억지스럽게 여겨지는 대목도 있었다. 이 영화를 [피아니스트]보다 뛰어난 폴란스키 말년의 걸작으로 손꼽는 평론가도 있던데, 나는 그러한 견해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영화임은 분명하다. 내가 영국인이었다면(영국 노동당원이었다면 더더욱) 보고 나서 무척 통쾌했을 것 같다. 아무튼 아직도 여운이 남는다. 여유만 된다면 다시 한 번 극장에 가서 보고 싶다. :)

별점 : ★★★☆ (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