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영화

2010년 최고의 영화

아는사람 2010. 12. 18. 23:53


작년에는 안 뽑았으니, 올해에는 뽑겠다.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으나 그때에는 연말에 공개적인 결산을 하지 않았으니, 올 연말에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내 양심상 그렇다는 것이고, 누구에게라도 그런 자격 같은 것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겠지.

순위는 무작위나 가나다순이 아닌, 정말 순위에 따른 순위다. 올 한 해 국내 개봉작을 기준으로 선정했다. 


1. 옥희의 영화 

옥희의 영화
감독 홍상수 (2010 / 한국)
출연 이선균,정유미,문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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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는 홍상수 감독이 천착하는 소재, 이를테면 남성의 성적 욕망이나 그 때문에 뒤틀리는 심리의 치졸함 같은 것에 동감은 해도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의 모든 영화를 다 찾아보았음에도, 선뜻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실제로도 그의 영화 전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며, 나쁘다고 평할 수 있는 영화도 많다고 생각한다(가령 나는 그의 초기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 같은 경우, '한국영화사'의 맥락에서 살펴보지 않는 한 좋은 평가를 내리기가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몇몇 영화는 정말 좋아한다. 정말 좋아할뿐더러, 훌륭한 영화라고도 생각한다. 훌륭한 영화이기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데 생각해보니 훌륭하기까지 한 것이다. [밤과 낮],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 수정]이 그렇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 [옥희의 영화]는 그중에서도 훌륭하다. 그는 이제 정말 정점에 오른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는 체계라는 것이 없는 것 같으므로, 정점이라는 단어가 적합한지는 모르겠다. 정점 같은 순간에 다다른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홍상수는 자신의 소재에 더는 갇혀 있지 않은 채, 그럼에도 여전히 그 소재를 포기하지 않은 채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다음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들리는 바로는 문성근에게 캐스팅 요청을 했고, 그와 별개로 지금 촬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2. 엉클 분미 

엉클 분미
감독 아피차퐁 위라세타쿤 (2010 / 독일,스페인,프랑스,영국,네덜란드,태국)
출연 삭다 카에부아디,젠지라 퐁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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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분미에 대해서는 길게 늘어놓았으니(
http://idiosynkrasie.tistory.com/168), 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이 지향하는 바 같은 것에 열광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만큼은 단연 주목할 만한, 놓쳐서는 안 될 성과라고 말하고 싶다.


3. 바흐 이전의 침묵 

바흐 이전의 침묵
감독 페레 포르타베야 (2007 / 스페인)
출연 알렉스 브렌데뮬,페도르 아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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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영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영화일 것이다. 이야기는 없지만, 맥락은 있다. 변주되지만, 반복되지는 않는다. 바흐에 관한 훌륭한 음악적 고찰을 영화적인 기록에 담아냈다. 


4. 인셉션 

인셉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2010 / 영국,미국)
출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타나베 켄,조셉 고든-레빗,마리안 꼬띠아르,엘렌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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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짐머의 사운드트랙이 주는 묵직함에 걸맞은 재미를 선사한 올해의 화제작. 이 영화의 아이디어가 출발하는 지점이나 끝나는 지점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고, 놀라울 것도 없고, 깊이도 없다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잊지 못할 쾌감을 선사한다. 그런 것이 바로 영화의 힘이리라.


5. 하얀 리본

하얀 리본
감독 미카엘 하네케 (2009 / 오스트리아,독일,프랑스,이탈리아)
출연 마리사 그로왈트,야니아 파우츠,미카엘 크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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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하네케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다. 그의 영화를 즐겁게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지만, 그의 영화를 낮추어본 적 역시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계속 그를 지지할 생각이다.


6. 악마를 보았다 

악마를 보았다
감독 김지운 (2010 / 한국)
출연 이병헌,최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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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논란은 무의미했던 것 같다. 모방범죄 같은 것은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잘 따져보면 그저 웃긴 얘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정말 재밌다. 그리고 그 재미는 탄탄한 시나리오와 군더더기 없는 연출에서 비롯한다. 잘 만들었기에 재밌는 셈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 잘 만든 부분에 대해 얘기하면 되고, 잘 만들었음에도 '울리지 못했다'면 그 이유에 대해 분석하여 비판하면 된다. 소재 자체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무의미하고 바보 같은 일이다(도대체 결점 없는 소재가 어디에 있나?). 아무튼 나는 이 영화를 무척 좋게 보았고, 깊이 역시 얼마든지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떠올렸던 별점은 네 개 반 ★★★★☆ (9/10)이었던 것 같은데, 그 생각은 여전하다. 하지만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잔인해서가 아니라, 한 번 보고 나면 조금 맥이 빠지는 영화이기 때문. 


7. 유령 작가 

유령작가
감독 로만 폴란스키 (2010 / 독일,프랑스,영국)
출연 이완 맥그리거,피어스 브로스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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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도 훌륭했고, 연출도 그러했으며, 시나리오도 좋았고, 촬영도 훌륭했다. 모든 것이 좋게 다가왔던데다가, 고전 헐리우드와 히치콕 영화의 향수마저 불러일으켰다. 이런 영화는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8. 리미츠 오브 컨트롤 

리미츠 오브 컨트롤
감독 짐 자무쉬 (2009 / 스페인,일본,미국)
출연 이삭 드 번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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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쉬 역시 점점 차가워지고 있는데, 더 관념적으로, 더 고독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나는 이게 이 감독의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본질을 대표하는 영화로 회자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연배우 이삭 드 번콜의 무미건조한 얼굴은 그 자체로 잊지 못할 영화적 경험이다.


9. 시 

감독 이창동 (2010 / 한국)
출연 윤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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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윤정희가 보여준 연기는 그렇게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다만 감독이 그 모든 것을 잘 살려냈을 따름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놀랍도록 아름다운 장면이 몇 있었고, 통속적임에도 쉽게 지울 수 없는 여운 같은 것이 결말에는 있었다. 곱씹을수록 더욱 깊어지는 영화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시'라는 제목을 온전히 채웠는지는 더 고민해보아야 할 부분인 것 같다. 현재 나로서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영화 자체가 훌륭하고 진중함에도, '시'라는 제목의 훌륭함과 진중함은 그것을 훨씬 웃돌기에, 결국 그 제목과 맞물린 이 영화는 일종 장르영화처럼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10. 공기인형

공기인형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2009 / 일본)
출연 배두나,아라타,이타오 이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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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아닌, 홍콩에 올해 초 갔을 때 보았던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이었는데, 매우 인상 깊었고, 꽤 좋았다. 이 영화의 한계는 명확한데, 조금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또 그만큼 친절하게 각각의 인물을 다룸에도, 그 모든 인물이 그저 나열되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는 점이다. 이 한계는 동시에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대목이기도 한데, 도쿄라는 대도시에서 사는 인물 군상을 천천히 나열하며 건네는 따스한 위안의 힘이 만만치 않기에 그렇다. 연기는 모두 훌륭했다고 생각하고, 연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대본의 몇 가지 부분이 수정되어야 했다고 본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나는 이 영화가 좋았다. 배두나의 연기에 대해서는...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배두나라는 배우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배역임은 분명했다고 생각하고, 어울리는 만큼 해냈다고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