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영화

박찬욱 감독전

아는사람 2009. 8. 11. 18:07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매달 한국영화 한 편을 선정해 '다시보기' 행사를 한 지 어느덧 2년이 흘렀다고 한다. 2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것이 바로 박찬욱 감독전. [달은...해가 꾸는 꿈]부터 시작해서 [박쥐]까지, [심판]을 제외한 박찬욱 감독의 전 작품을 8월 6일부터 13일까지 두 차례씩 상영해주는 행사. 게다가 관람료는 무료. 

-8월 6일과 8일에 한국영상자료원을 찾아갔다. 지은 지 오래되지 않은 고층빌딩 여러 개가 밀집한 디지털미디어시티 주변은 황량해서 무섭기까지 했지만, 어쨌든 한국영상자료원의 건물은 오래되지 않은 건물다웠다. 극장 상영관도 마찬가지여서, 서울아트시네마 수준을 예상하고 갔던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달은...해가 꾸는 꿈]은 박찬욱 감독의 데뷔작이다. 흥행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면에서도 참담한 실패작으로 일컬어지곤 하는 작품이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덕분인지 무척 즐겁게 감상했다. 황량한 도시 속에서 상반된 삶을 살아가는 깡패(이승철)와 사진작가(송승환) 형제를 담아낸 이 작품에는 독백 나레이션이나 감각적 영상 등 왕가위를 위시한 홍콩 영화의 영향이 느껴졌고, 사소한 대화에서 이는 가벼운 실랑이로 웃음을 자아내는 우디 앨런 식 유머감각도 엿보였다. 그 모든 것은 그러나 능숙하다기보다는 어설픈 손놀림으로 버무려져 있어서 낯 간지러운 대사나 키치적 면모 등 실소를 자아내지 않고는 볼 수 없는 부분이 심심치 않게 나왔다. 영화 상영 중 관객 대부분은 쉴 새 없이 낄낄대며 웃었지만, 감독이 웃음을 의도하지 않은듯한 장면에서 꽤 자주 그러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몇몇 화면구성은 정말 좋았고, 필름 누아르에 재즈를 접목시킨 듯한 음악도 마음에 들었다. 이승철 대신 전문배우를 기용했더라면 이렇게까지 홀대받지는 않았으리라는 감상이 들었을 만큼, 개인적으로는 좋았다.


-[3인조]는 반면 어설프다기보다는 감독이 자신의 의도에 맞게 완벽히 통제한 최초의 작품으로 다가왔지만, 무척 불쾌하게 감상했다. 무엇보다도 각본에 큰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영화의 전반부에서처럼 3인조의 폭력을 그저 막 나가는 무엇으로 그려내고 싶었다면 끝까지 막 나가는 모습만 보여주어야 했고, 영화의 후반부에서처럼 그들의 폭력을 탄생케 한 인간적인 사연을 보여주고 싶었으면 앞에서, 혹은 중간에 그러한 부분을 더욱 자세히 묘사했어야 했는데, 이 영화는 서사의 흐름을 그렇게 조절하는 대신 아무 생각 없는 폭력을 그려내는 듯하다가 갑자기 감상적으로 폭력의 주체를 옹호하려 든다. 호감 가는 [달은...해가 꾸는 꿈] 다음에 이렇듯 그저 불쾌하기만 한 영화를 선보인 데에는, 각본 크레딧에 박찬욱 감독과 함께 이름을 올린 이무영에게 책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박찬욱 저질 빠 인증). 


-[복수는 나의 것]은 두 번째 본 것이었지만, 큰 스크린으로는 이번이 첫 관람이었다. 상영 후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박찬욱 감독은 시네마스코프로 찍은 영상의 좌우 부분이 스크린에 조금 잘린 채 상영되어서 아쉬웠다고 밝힌 바 있었지만, 나로서는 큰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기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예전에 보았던 바를 거의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던 데다가, 전문적인 지식도 없으니 그랬던 것이겠지만. 아무튼 이 날 시네마테크 상영관에서 이 영화를 관람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압도적으로 커서 숭고하게까지 들리는 음향효과였다. 청각 장애인 류가 살아가는 이 영화 속 세상의 소음은 어찌나 크고 끔찍한지. 관객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대는 이어부 프로젝트의 사운드트랙과 함께 그러한 음향을 듣고 있자니, 고통스럽다기보다도 조금 슬펐다. 


-관객과의 대화는 이동진 기자의 진행으로 1시간가량 이어졌다. 박찬욱, 송강호, 신하균이 와서 영화도 함께 관람하고 했던 터라, 300석이나 되는 객석이 가득 찬 것으로도 모자라 통로 부근에까지 사람이 들어찼다. [복수는 나의 것]을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으로 여기는 몇몇 사람이 질문공세를 퍼붓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그때는 박찬욱 감독이 마치 청문회에 불려나온 전직 대통령처럼 보여서 측은하기도 했다. 


답변은 역시나 그다웠다. 가령 이러한 내용의 질문이 있었다. '[복수는 나의 것] 이후 사회적 의제를 작품 속에서 전면적으로 다루지 않는 이유는 나이를 먹어가며 사람들이 지니게 되는 보수적 경향에 의한 것인가? 즉, 당신도 변절한 것인가?' 이에 박찬욱은, 꼭 그렇지는 않고 [공동경비구역 JSA]와 [복수는 나의 것]으로 남한 사회에서 분단과 계급 문제를 한 차례씩 다루고 나니, 신화적 원형 같은 부분으로 자연스레 방향이 전환되었다고 말했다. 예전에 찍은 작품이 자신을 어떠한 방향으로 밀어내고 자신은 거기에 따라 작업할 뿐 계획을 세우고 특정한 주제를 처음부터 결심해서 나아가는 일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자아도취적이고 변태적'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까지 굳이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할 이유가 있는지, 앞으로 관객을 더 배려하는 작품을 찍을 의향이 있는지 묻는 사람도 있었다. 그에 대한 답으로는, 자신은 관객을 배려한답시고 [박쥐]를 만들었는데 제멋대로 만든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올드보이] 같은 경우는 가장 걱정했던 작품인데 오히려 많은 관객이 그것을 수용했다면서, 자신으로서는 그냥 하던 대로 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대답했다. 


조금 딱딱한 어조로 옮겨놓았지만, 위의 것을 포함한 여러 질의응답은 대부분 우호적인 언어로 표현되었고, 분위기는 시종일관 유쾌했다. 박찬욱 감독의 답변에 아무래도 가장 큰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지만, 송강호의 구수한 입담, 신하균의 참석(;;)은 이 행사를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으로 만들어주었다. 관객 반응이 워낙 좋아서 이동진 기자가 지적한 것처럼 무슨 팬클럽 창단식 같았다;; 


사실 이날 관객과의 대화는 '기자와의 대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동진 기자가 직접 진행하고 질문하는 비중이 높았다. 거기에 큰 불만이 일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재치 있고 능숙하게 대화를 진행해나가며 날카롭고 흥미로운 여러 질문을 던져 관객을 적절히 대변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오히려 관객에게 차례가 돌아가자 너무 세심하고 사소한 부분에 관해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려는 듯한 박찬욱 마니아층의 질문이 이어져서 실망스러운 대화가 오가기도 했다("이러저러한 소재가 복수 3부작에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생각 안 납니다." "그럼 저러이러한 소재는 어떻죠?" "아무 의미 없습니다." 등등) 


-그밖에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들었던 몇몇 비화 :


1. [공동경비구역 JSA]는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달리 박찬욱 감독이 제작사의 간섭에 그리 시달리지 않고 재량껏 찍고 싶은 것을 실컷 찍어서 만든 영화라고 한다. 분단문제를 다루는 데에는 그 영화 속에서 표현한 방식대로 하는 것이 맞는 것으로 여겨져서 그렇게 했을 뿐이라고. 


2. [복수는 나의 것]의 특이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결말에 관해 이동진 기자가 질문하자 박찬욱 감독은 사실 그 결말 말고 여러 종류의 다른 결말이 있었다며 그 중 몇 가지를 생각나는 대로 들려주었다. 동진이 류를 살려주려다가 터벅터벅 걸어가는 류의 뒷모습을 보고 변심해서 차로 들이받으며 크레딧이 올라가는 결말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류를 물속에서 죽이고 걸어나오는 동진의 등에 그의 딸 유선이 매달려 있는 것. 최종적으로 선택된 결말은 그 영화에 참여하거나 기여한 많은 이들이 반대했던 안이었지만, 당시 [살인의 추억]을 만들던 봉준호 감독이 재밌다고 해서 택하게 되었다고 그가 우물쭈물 밝히자, 많은 관객이 웃었다. 그래도 나는 그 '데우스 엑스 마키나' 방식의 결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마 다른 사람도 대부분 마찬가지일 것 같다.


3. 박찬욱이 송강호와 한 입으로 증언한 사실 : [공동경비구역 JSA]가 개봉했을 때는 제작사 측으로부터 고급 양식당에서 거한 식사를 대접받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이 개봉한 다음에는 지하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조촐한 자장면을 지원받았다고 한다. 흥행은 그 정도로 중요하고, 딱 그만큼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4. 송강호는 [복수는 나의 것]의 흥행실패를 어느 정도 예견했다고 한다. 그래서 신하균, 배두나와 함께 '이 영화 개봉하면 다음 영화 계약하기 힘들어질 테니까, 촬영 끝나기 전에 다음 영화 계약해두자'는 얘기를 나누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고 한다;; 송강호는 [YMCA 야구단]을, 신하균은 [지구를 지켜라]를 그다음 작품으로 계약했단다.


5. 송강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복수는 나의 것]이 다소 불편한 영화였음을 밝혔다. 연달아서 같은 감독과 작품을 하는 데 느낀 부담감도 컸던 탓에 출연제의를 세 번이나 거절했다고. 반면 신하균은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달은...해가 꾸는 꿈]에 나온 나현희. 손담비와 꼭 빼닮았다. 아니, 손담비가 나현희를 빼닮았다고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