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140

[OSS 117: Rio Ne Repond Plus]

여기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은 또 한 명의 영웅이 등장했다. 이름하여 OSS 117. 007 시리즈의 패러디물임이 명백한 [OSS 117 : 리오 대작전]의 주인공 OSS 117은 프랑스 최고의 비밀요원이다. 그는 당연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고, 잘생기긴 했으나 그만큼 느끼하며, 유머감각보다는 웃음소리가 더 매력적인 남자다. 잘생겼다는 사실만 빼놓고 보면 오스틴 파워와 유사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배경은 60년대고, 미모의 이스라엘 요원과 함께 신나치 추종세력의 지도자를 타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OSS 117은 소수인종과 여성 등을 향한 차별(보다는 차별 발언)을 무차별적으로 하는 백인 남성이기에 정치적으로 무척 불공정하게 보이지만, 이러한 부분은 웃음을 위한 것이므로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다..

독백/영화 2009.07.25

[Bellamy]

불에 탄 시체와 사고가 난 차량. [벨라미]는 아름다운 풍경을 응시하다가 문득 그러한 피사체를 보여줌으로써 영화의 도입부를 마무리한다. 그리고는 폴 벨라미 형사가 등장한다.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연기한 이 사내는 처음에는 전혀 형사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범인의 지문이나 단서를 찾아 헤매는 대신 외딴 별장에서 아내와 함께 낱말퍼즐에 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서전까지 펴낸 유명한 형사인 그에게는 그러나 사건이 찾아오고, 그는 그 사건을 굳이 거부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죽고 난 다음 그 죽음의 배후를 파헤치는 형사가 등장한다면, 흥미진진한 스릴러물을 기대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벨라미]는 그러나 그러한 기대를 아주 침착하게 저버리는 영화다. 오늘날 관객을 지나칠 정도로 극적인 몰입과 전율..

독백/영화 2009.07.24

fiction2

소심한 것은 착한 것이 아니야. B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저 억눌린 것뿐이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표현하지 않는 것과 엄연히 다른 일이거든. 어느새 나는 다시금 미소를 짓고 있었다. B는 나의 미소를 무표정한 얼굴로 되받았다. 나는 아주 천천히 미소를 거두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권했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차를 기다리며 B는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는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나는 그의 풀어진 눈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fiction

역 주변은 어두웠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낡은 여관에 들어갔다. 화장실 바닥에는 날파리 같은 것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배가 아팠다. 30대 중반 가량의 여자가 들어왔다. 그 여자는 시종일관 당당했고, 나는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웃고 싶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웃고 있었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자신의 이름이 기쁨이라고 말했다. 나는 기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푹 숙였다.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에는 영혼이 깃들 수도 있겠어. 몸을 씻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러나 다시 실패할 것이고, 다시 게으름에 굴복할 것이고, 재능을 탓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서커스단에서 자라난 코끼리는 아무리 몸집이 커져도 자신을 묶어놓..

번호이동

3년 반 만에 휴대전화를 바꿨다. 어차피 별 쓰임새 없는 전화여서 그냥 없애버릴까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없애버려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버튼 몇 개가 떨어지려 하는 옛 기기를 뒤로하고 새로 마련한 것은 평범한 슬라이드폰. 최신형은 아니지만 그리 빛바래 보이지는 않는다. 무미건조한 나의 생에 걸맞은 휴대전화인 것 같아 반갑다. 앞으로 2년간 약정의 의무로 묶인 관계이니만큼 잘 해보고 싶다. 험한 손길과 메마른 전파수신을 잘 견뎌내 주기를.

[Mulholland Dr.]

(멀홀랜드 드라이브. 미국 LA에 실제로 존재하는 도로라 한다.) (나오미 와츠, 로라 엘레나 해링.)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0. 하나TV에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올라와 있어서 다시 보았다. 0-1. 불과 몇 달 전에 EBS에서 이 영화를 방영했던 적이 있다. 그날 나는 밖에 있었고, 정확히 말하자면 린치의 영화 속에 등장할 법한 낯설고 어두운 모텔 방 안에 있었다. 그 방 안 침대에 누워 TV 채널을 돌리다가 EBS에서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불행히도 그때 막 영화가 시작했던 게 아니라 시청의욕이 좀처럼 일지 않았고 또 너무 피곤했기에 곧 TV를 끄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잠은 쉽사리 오질 않아 한참을 뒤척였고, 그 도중 몇 번이고 TV를 몇 번이..

독백/영화 2009.07.16

음악들

1. 적당한 성능과 가격의 CD카세트를 하나 살 생각이다. 어설픈 오디오기기를 마련해놓으니 음악을 듣는 일이 부담되고, 막상 들어도 그리 즐겁지가 않다. 2. 이어폰을 사용하면 나중에 귀가 아파서 MP3 플레이어를 거의 들고 다니지 않지만, 가끔 기분이 내키면 사용할 때도 있다. 며칠 전 밖에 나갔을 때도 들고 갔는데, Kem의 Heaven과 못의 카페인을 들으며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라디오헤드의 곡을 들으며 거의 항상 그러한 감정에 휩싸인 채 지내던 때가 있었는데. 그러한 시절이 과거형으로만 다가와서 서글프다. 가벼운 유희 혹은 지적인 탐구대상 정도로 음악을 대하는 관습이 생긴 것 같아 더욱 서글프다. 3. 단음계의 피아노 연주, 그리고 끔찍한 노래실력. 나에게는 확실히 음악적인 재능이 부족하다. ..

독백/음악 2009.07.11

기록, 독백

책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짧은 글, 기사, 시 몇 편을 제외하고라면 그 무엇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글쓰기에 관해서도 비슷한 상황이다. 이 블로그에 별것 아닌 글을 비공개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하는 게 거의 전부다. 한계에 다다른 것 같다. 돌파구가 필요하다. 아, 하지만 이 극적인 해결책을 향한 갈망이 모순적임은 잘 안다, 일상에서 꾸준히 풀어나가야 할 문제일 테니까. 그래도 그러한 것을 바라는 심리는 멈출 수가 없다. 오이디푸스의 뒤에서 걷는 일이란 이렇듯 가시방석이다. 다 알고도 죄악을 저지르고 싶어하고, 다 알기에 그러한 욕망을 짓누른다. 오늘날의 비극은 그래서 모양새가 조금 흐트러진다. 희극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꼭 속물인 것은 아니다. 그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