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140

[Blue Velvet]

[블루 벨벳]을 보았다. 괴상한 B급 드라마와 무의식을 탐구하는 예술영화가 뒤섞여 있는 듯한 이 영화에는 안젤로 바달라멘티의 음울한 배경음악과 함께 친숙한 올드팝 두 곡이 흘러나온다. 'In Dreams'와 'Blue Velvet'이 바로 그 두 곡이다. 영화 속에 나오는 중요한(혹은 중요한 것 같은데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대사 대부분은 이 두 곡의 가사에서 빌려온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로지 꿈속에서만 '그대'와 함께 있을 수 있음을 슬퍼하는 'In Dreams,' 사랑을 꽉 붙잡아두려 했지만 결국 그 기억만 남아 눈물을 흘리는 'Blue Velvet'의 주체들은, 비록 영화가 화창한 날씨 속에서 끝을 맺음에도 그 음울한 바탕을 지탱한다. 데니스 호퍼가 연기한 프랭크 부스는 꽤 인상 깊은..

독백/영화 2009.07.09

오, 여름!

시립도서관에 가보니 초등학생이 그리고 쓴 시화가 여러 점 전시되어 있었다. 주제는 시간·여름·방학 정도로 미리 주어진 것 같았다. 찬찬히 둘러보다 보니 구름에 관한 한 학생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동글동글하다느니 푹신푹신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다소 뻔한 설명을 하다가 마지막에 '내 마음에 따라 구름도 바뀌네'라는 구절을 집어넣은 글이었다. 내 마음에 따라 구름도! 아, 거 참 초등학생치고는 괜찮은 통찰력인데, 하며 거만한 평가를 마치고 다른 작품을 둘러보다가 도서관 밖을 내다보았다. 오전에 내린 비의 흔적은 한 줌도 보이지 않았고 감당키 힘든 햇살만 있었다. 거 참 지겹도록 내리쬐는군, 하며 도서관 밖을 거닐 때는 몰랐는데 집에 와보니 '내 마음에 따라'가 생각났다. 거 참 지겹도록 살고 있군, ..

[Leningrad Cowboys Go America]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는 무규칙 이종격투기의 정신을 영상의 문법으로 옮긴 것과 같은, 막 나가는 영화였다 :-) 아키 카우리스마키 필름. 장르 불명의 밴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즈. 헤어스타일에 주목할 것.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즈의 매니저역을 맡은 게리 올드만... 이라 해도 될 정도로 그와 닮은 마티 펠론파. 역시 헤어스타일에 주목.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즈 중 동상에 걸린 한 멤버의 아버지. 역시 헤어스타일이 같다. 미국에 갔다가 실종된 그들의 조상. 그들의 곁에 있는 개. 그들의 신생아. 어찌어찌 하여 아메리카에 간 레닌그라드 카우보이즈, 로큰롤 밴드로 컨셉을 잡고 여러 클럽을 전전하게 되지만... 그들이 공연한 클럽은... ...망한다.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건강미 넘치는 밴드가 되고자 살갗을..

독백/영화 2009.07.06

환상속의그대

리비도는 무한하고, 현실은 유한하다. 현실이 아니라 환상 속에서 자신의 욕망을 좇는 사람은 예외적 존재가 아니다. 샴푸의 요정, 백마 탄 왕자……등은 외로운 사람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애인을 둔 사람에게 오히려 더 유효한 환상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완전한 교감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은 더욱 견디기 힘든 좌절이기에. 환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바로 이 지점을 사고의 출발로 삼는 것, 여기에서 완전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신화를 해체하기 시작하는 것, 그로부터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참을 수 있는 존재의 가벼움

나는 내가 말하는 것보다 아주 가벼운 사람이다. 가볍게 행동하는 것보다 무겁게 행동하는 게 훨씬 쉬워서 무거운 사람처럼 있을 뿐, 실상은 깃털보다 조금 더 무거울 뿐인 인간이다. 무겁게 말할 때 진땀이 흐르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다. 서투른 무거움이란 끔찍하다. 연기는 배우만 하는 게 아니다. 연인 앞에서 사랑을 갈구할 때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데 눈이 어색하게 감기고 얼굴이 일그러지면 분위기가 깨진다.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고들 한다. 그렇다, 하지만 기교 없는 진심이 통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 결국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런 것 같다. [손수건을 꺼내라]라는 영화에는 10살이 조금 넘은 소년이 20살이 훌쩍 넘은 여성과 동침하는 장면이 있다. 내가 동경하는 삶은..

[Le Silence de Lorna]

("로나! 로나!") 클로디가 부르는 로나의 이름에는 수없이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제발 도와줘, 나를 사랑해줘, 그리 냉정하게 나를 대하지 말아줘, 나를 인간적으로 ……. 로나는 그에 대해 우선은 침묵하고, 마지못해 대답하고, 뒤늦게 절절히 대답한다. [로나의 침묵]은 극사실주의로 일컬어도 될 정도로 전혀 가공하지 않은 듯한 현실을 다루는 영화다. 마약중독, 위장결혼, 살인 등 꽤 자극적인 소재를 아우름에도 흥미진진하다기보다는 고통스럽게 이 영화가 다가오는 이유는, 영화가 기승전결의 이야기를 택하되 기승전결의 연출을 택하지는 않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특히 폭력과 성애는 오늘날 대다수 영화가 지향하는 바와는 달리 여기에서 날 것 그대로, 고요하면서도 끔찍하게 표현된다. 잔잔한 물결 아래 갑자기 나타나..

독백/영화 2009.07.01

ㄲㅜㅁ

1 "남자 대부분은 그저 여자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하잖아. 그게 혼자 있는 것보다 불편하다고 해도 말이야. 그렇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만족스러워하지 못하는 남자도 있단 말이야." 2 세 갈래로 나누어진 돌담길, 언덕 위쪽으로 어떠한 여자와 함께 올라가려다 문득 저만치 골목 입구에서 친숙한 얼굴의 또 다른 여자를 마주한다. 반가워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쨌든 아는 사람이니 용기 내어 인사를 건넨다. 그녀는 생각보다 훨씬 반가워한다. 함께 걷던 여자는 내가 곁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채 계속 돌담길 위로 올라가고 있다. 3 친숙한 얼굴로 나를 반가워했던 그 여자는 이제 나를 계속 죽이려 든다. 나는 어떻게든 그녀를 설득하고자 하지만 소용이 없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나는 완전한 ..

불안, 불면

시간을 있는 그대로 흘러가게 놔두는 데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 사회가 치열한 경쟁을 조장하는 사회이기 때문일까? 살아있다는 것은 원래 끝없는 불안정의 지속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니면.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불륜을 방관하는 것과 실제 생활 속에서 불륜을 목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다. 지겨운 통속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체험하는 일이 늘 새롭고 놀랍다는 데 있지 않을까. 개별자는 애써야만 초연할 수 있다, 평범하건 비범하건. 잠 못 드는 밤, 악의에 관한 글을 읽는다. 반성하고, 어리석음을 참회하다가도 곧 나이 많은 방화범처럼 서투른 몸짓으로 달려가 악의에 기름을 끼얹고 싶어하는 자신을 의식한다. 윤리가 어디에 있는가, 저 아름다운 동상 앞에서 박제된 것은 과연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