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압승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노무현 정권의 실정 탓도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고, 한나라당의 이미지 쇄신도 한 몫 거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박정희'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과연 '이명박'이라는 인물이 대선 당시 외친 '경제를 반드시 살리겠다'는 구호가 그렇듯 많은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을까요? 더불어 현재 차기 대통령 후보 중 지지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는 박근혜 의원의 인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박정희 실화, 박정희 설화, 박정희 신화! 전 국가를 병영처럼 다루며 자기 마음대로 비상사태를 선포하던 그의 행태는 '한국식 민주주의'로 미화되어 받아들여지고, '한강의 기적'은 피땀 흘려 일한 국민 전체가 아닌 박정희 한 개인의 공으로 돌려지곤 하는 관습. 이러한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한 국민은 여전히 많고, 그러한 관습을 자신의 신념으로 견지하고 있는 분들도 아직 많은 것 같습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이하 존칭 생략) 작부를 끼고 즐기다가 총에 맞아 죽고 난 이후에도, 민주화세력을 주축으로 한 참여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한국 사회는 이 박정희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했죠. 그동안 박정희의 참모습을 조명해보려는 각계각층의 노력이 있었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이 '박통'을 향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비우호적인 분위기보다 우세한 것으로 보입니다.
1998년 초판이 발간된 진중권 씨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에 따르면 10년 전에는 이러한 박정희 신화가 더욱 굳건했나봅니다. 적어도 그러한 신화를 퍼트리려는 세력의 기고만장함은 확실히 지금보다 더했던 것 같습니다. 학계에서는 제대로 된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취급받기도 힘든 박정희를, 『월간조선』을 비롯한 극우언론매체와 그에 동조하는 '지식인'들은 칭송하기 바빠했으며, 한술 더 떠서 도대체 그렇게 중요한 인물을 연구하지 않고 딴 짓거리하는 학계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성토했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지요.
진중권 씨 표현대로 말하자면 "난리도 아니었"던 것이죠. 박정희가 남긴 고언,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감동적으로 해석한 조갑제 편집장은 자신이 쓴 박정희의 전기소설 제목을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정했다고 합니다. 박정희의 무덤에 아무리 침을 뱉어도 역사는 그를 정당하게 평가해주리라는 함의가 담겨있었겠죠. 진중권 씨는 그러한 함의를 읽어내고는 이렇게 맞받아친 것입니다. "그래, 내가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그리고는 두 권의 유쾌한 책을 통해 열심히 뱉어서 '캭퉤일'을 흔들어낸 다음, 그에게 헌정한 셈이죠. 이름하여, 박정희교 신자들을 위한 캭퉤일!
이 캭퉤일을 만들어낸 바텐더 진은 학문적으로 이들을 비판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문학적으로 풍자한다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죠. 이들은 진지한 비판대상조차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기들이 한 말을 자기들이 반박하는 극우들의 태도는 저자의 말을 듣자면 정말 우습게 여겨질 정도입니다. 진중권 씨의 표현을 다시 빌어보자면 '그들 함대에서 쏜 대공포가 그대로 다시 그들 함대로 떨어져서 자멸하는 꼴'이죠.
극우세력이 그의 텍스트를 '해석'해서 '사상검증'을 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예 책날개에다가 대놓고 자신이 "1963년 세포분열로 태어난 빨간 바이러스"라고 커밍아웃(?)한 저자 진중권. 좌우의 스펙트럼을 놓고 보자면 분명히 좌로 '편향'되어있는 면이 있는 저자지만, 이 책 자체에서는 그러한 '편향'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진중권 씨가 책에서 거듭 밝혀놓은 바처럼 제대로 된 우파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니까 좌파가 잠시 본업을 접어두고 파트타임으로 도와주러 간 듯한 느낌입니다. 그렇듯 이념적 편향은 찾기 힘들지만 한국의 극우파들이 주장하는 측면의 '편향'은 분명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편향'이란 결국 '자기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것들'을 가리키는 용어니까요.
이 책에는 박정희 혹은 박정희 찬양자에 관한 글이 많긴 하지만 우익 세력 전반에 대한 언급 역시 그에 못지않게 담겨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몇몇 소설가의 파시즘에 관한 대목을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들이 대놓고 파시즘을 지향한 게 아니라 정치와는 별 관계없어 보이는 문학의 자유라든가 낭만주의 미학 같은 개념을 옹호함으로써 나치 수준의 파시즘과 별다를 바 없다는 주장을 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이문열 씨의 친가부장적인 사고관은 국가의 원수와 '아버지'를 동일시하는 국가주의자의 이데올로기와 일맥상통하고, 이인화 씨는 자신의 악마주의적 천재론을, 악마보다 더 심하게 국민을 수탈한 '박정희'라는 '천재'를 정당화하는 미학적인 근거로 활용했다고 하니, '순수문학,' 혹은 '순수예술'이라는 개념이 약간 허탈하게 여겨지기도 하는 등 여러모로 머릿속이 복잡해지더군요.
한국경제를 단기간에 발전시키는 데 박정희가 어느 정도 공헌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대통령 했더라도 마찬가지였으리라는 주장은 약간 억지라고도 생각하고요. 하지만 박정희가 단기간에 발전시킨 한국경제의 체질은 문제 삼을 만하고, 장기독재를 시도하며 국민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점은 확실히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가 경제수치 향상에는 도움을 주었어도 그것이 전적으로 그의 공은 아니며 실물경제에 미친 영향이나 다른 사회분야에 그가 미친 부정적 영향을 고려해보았을 때는 결코 칭찬할만한 점이 아니라고 봅니다. 전두환 시절에 우리나라는 완전고용에 가까운 경제호황을 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오늘날 전두환을 '훌륭한 지도자'로 평가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박정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평가가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박정희 신화가 다수에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한, 그 신화의 신봉자들이 이 사회의 주류로 떠받들어지는 한, 이 나라에 제대로 된 역사교육은 불가능할 겁니다. 실제로 그러한 세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1년 전 정권을 인수하고, 친 정부여당 성향의 공정택 씨가 서울시 교육감으로 당선된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편향'된 역사교과서를 뜯어고친다며 자신들의 '편향되지 않은' 역사관을 교과서에 집어넣고,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시킨다며 강연회를 계획하고 그 강사로 조갑제 씨를 비롯한 극우인사를 여럿 섭외했죠. "실천하는 국가주의자"답게 이러한 역사'교육'뿐만이 아니라 '한국식 민주주의'의 '역사'를 직접 계승해나가려는 움직임을, 각종 인터넷 규제법안이나 방송법 개정 등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하고요.
책의 끝머리에 진중권 씨는 "국민이 고분고분하면 국가가 버르장머리가 없어진다,"는 말을 남깁니다. 에드먼드 버크였던가요, 그 역시 비슷한 말을 남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한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나빠진다.' 모두가 꼬장꼬장해질 수는 없을 겁니다. 인간이란 모두 저마다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는 법인데 '꼬장함'을 단지 그 정당성만으로 강요하기는 힘들 테니까요. 하지만 설득은 가능하겠죠. 의식 있는 국민이 고분고분해질 수 있는 자유 대신 꼬장꼬장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저항하는 것, 이러한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것은 다수가 지향해도 괜찮은 바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