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6

폭염/폭우

폭염 어제 그렇게까지 더우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채 서울에 갔다. 시청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정오에 조금 못 미친 시각이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땀이 줄줄 흘렀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막걸리를 마시는 아저씨 몇 분이 보였다. 상주로 나와 있던 정치인 몇 명이 손을 꽉 잡아주었다. 더운 날 따스한 손이 그리 밉지는 않았다. 폭우 오늘 이렇게까지 비가 내리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채 깨어나 줄곧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홀로 점심을 차려 먹고 비 내리는 바깥 풍경을 내다보았다. 저녁도 홀로 먹게 될 것 같다. 집안에서 이렇게 혼자 끼니를 해결하다 보면 군것질거리나 음주로 식사를 대신하는 이들이 절로 이해가 간다. 허기는 무엇으로도 잠재울 수가 있지만, 외로움은 그렇지가 않다.

은둔생활

복학신청을 하러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한 3년 만에 찾아간 것이었음에도 알록달록한 예술대학 건물은 친숙하게 다가왔다. 학교에 다닐 생각, 즉 그곳에서 다른 이들과 만나 어울리며 지낼 생각을 하니까 그 친숙함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불현듯 누군가가 강의실에서 공포영화 귀신처럼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정말 두려웠다. 사방을 살펴보며 슬금슬금 행정실로 걸어가서, 절차에 따라 간단한 서류를 채워넣고 전역증을 제출했다. 그게 내가 한 일의 전부였지만 정신이 없었다. 버스에 올라타서 집에 가는 동안 나 자신이 무척 자그마하게 여겨졌다. 내가 걸쳤던 티셔츠는 어제 새로 산 것이었음에도 넝마조각처럼 느껴졌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마트에 들렀다. 거기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장..

번호이동

3년 반 만에 휴대전화를 바꿨다. 어차피 별 쓰임새 없는 전화여서 그냥 없애버릴까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없애버려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버튼 몇 개가 떨어지려 하는 옛 기기를 뒤로하고 새로 마련한 것은 평범한 슬라이드폰. 최신형은 아니지만 그리 빛바래 보이지는 않는다. 무미건조한 나의 생에 걸맞은 휴대전화인 것 같아 반갑다. 앞으로 2년간 약정의 의무로 묶인 관계이니만큼 잘 해보고 싶다. 험한 손길과 메마른 전파수신을 잘 견뎌내 주기를.

오, 여름!

시립도서관에 가보니 초등학생이 그리고 쓴 시화가 여러 점 전시되어 있었다. 주제는 시간·여름·방학 정도로 미리 주어진 것 같았다. 찬찬히 둘러보다 보니 구름에 관한 한 학생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구름이 동글동글하다느니 푹신푹신하다느니 하는 식으로 다소 뻔한 설명을 하다가 마지막에 '내 마음에 따라 구름도 바뀌네'라는 구절을 집어넣은 글이었다. 내 마음에 따라 구름도! 아, 거 참 초등학생치고는 괜찮은 통찰력인데, 하며 거만한 평가를 마치고 다른 작품을 둘러보다가 도서관 밖을 내다보았다. 오전에 내린 비의 흔적은 한 줌도 보이지 않았고 감당키 힘든 햇살만 있었다. 거 참 지겹도록 내리쬐는군, 하며 도서관 밖을 거닐 때는 몰랐는데 집에 와보니 '내 마음에 따라'가 생각났다. 거 참 지겹도록 살고 있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