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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는 책보다 텔레비전을 더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그리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은 아니겠지만,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그러하네요. 도서관에서 한동안 책을 빌려 읽을 때는 잘 몰랐는데, 도서관 출입을 줄이고 집에 있는 책 위주로 읽다보니 상대적으로 덜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대출기한이 정해져있지 않아 언제든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탓일까요. 아무튼 골방에 갇혀 군만두만 먹으며 텔레비전만 보아야했던 <올드보이>의 오대수와는 달리 선택권이 있음에도 저는 오대수처럼 생활하고 있습니다.
오늘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만, 다행히도 경인방송(OBS)을 보다가 헌책방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흐뭇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전에는 인천 배다리를 지키는 시민의 모임을 다룬 <도시재생>이라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아서 그러했고요(아벨 서점 주인분도 나오시더라구요), 오후에는 프로그램 이름은 정확히 모르겠으나 영국에 있는 헌책방 마을 헤이온와이Hay-on-Wye가 소개되는 것을 보았기에 그러했습니다.
영어 원서를 직접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오늘날 자랑할만한 특기는 아니겠죠. 게다가 읽는 속도도 느리고 이해력도 부족하다면 더더욱 그럴 테고요. 종종 원서를 읽기는 하지만 늘 부족함만 느끼곤 하는 저는 그래서 이 헌책방 블로그를 시작하며 다짐했습니다. 한글 헌책방을 우선적으로 찾아갈 것, 그 외 다른 언어로 된 헌책을 파는 곳에 찾아가서 허세 부릴 생각은 하지 말 것. 이러한 다짐은 그러나 헤이온와이의 모습이 나오는 브라운관을 보며 서서히 흐리멍덩해지더군요. 저라는 인간이 워낙에 흐리멍덩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헤이온와이는 예전부터 출판업계 종사자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거나 작가와 비평가가 많이 모여 사는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헌책방 마을이 아니라고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제부터 이곳은 헌책방 마을이다!"하는 식으로 선포된 곳에 가깝지요. 특별히 볼 것도 즐길 것도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헤이온와이에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와서 "이제부터 이곳은!" 하는 식으로 누군가가 헌책을 들여온 겁니다. 그 누군가는 바로 리처드 부스Richard Booth인데요, 당시 23살이던 그가 헤이온와이 최초의 헌책방을 열고 난 이후로 다른 이들도 헌책방을 직접 열기 시작했답니다. 현재 인구 1900명의 마을 헤이온와이에는 40개가 넘는 헌책방이 있다고 하네요.
리처드 부스는 텔레비전에 소개된 것만 살펴보아도 대단한 기인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는 헤이온와이를 왕국으로 선포하여 직접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그 날이 바로 4월 1일 만우절이었다고 합니다. 영국 정부에 관한 비판의 의도도 담겨 있는 그 퍼포먼스를 통해 왕이 된 그는 주변의 지인을 장관으로 임명한 후, 왕의 품격에 걸맞은 행위를 보여주었던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다트판을 이용했던 것 역시 그러한 행위 중 하나였고요. 헤이온와이를 홍보하고자 평소보다 더더욱 기이한 행동을 한 것도 같습니다. 저 위에 제가 정보를 링크해놓은 책은 바로 그가 직접 헤이온와이를 소개한 자서전 비슷한 책이라고 합니다. 조만간 구해서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헤이온와이에서는 매년 페스티벌도 열린다고 합니다. 빌 클린턴이 "지성인의 우드스탁 축제The Woodstock of the mind"로 표현하기도 했다는 이 축제는, 2002년부터 가디언지The Guardian가 공식 스폰서가 되어, 뮤지컬이나 영화상영 등을 하는 거대한 페스티벌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공식 홈페이지(http://www.hayfestival.com/)까지 있고, 현재 영국 헤이온와이 이외에도 세고비야와 카르테헤나 같은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이 헤이 페스티벌이 전파되어 열린다고 하네요. 2009년 페스티벌은 5월 21일부터 31일까지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저처럼 시간이 있고, 저와는 달리 돈도 조금은 있으며, 저와는 전혀 다르게 지성까지 겸비하고 계시다면 한 번 찾아가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