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일(화)
-파리 북역, 브뤼셀 미디역, 그랑 플라스
드디어 파리를 떠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그동안 날씨가 아주 좋지는 않았어도 돌아다니지 못할 정도로 나빴던 적도 없었건만, 이날은 처음으로 우산을 쓰지 않고는 밖에 나가지 못할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렸다. 오후 2시 기차였기에 아침을 먹고 한동안 기다려보았지만 비는 좀처럼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우산을 쓴 채 수트케이스를 끌고 숙소를 나섰다.
RER선을 타고 다시 찾아간 북역은 역시나 그리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곧 그곳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갈 생각을 하니 뭔가 애틋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파리 시내에 있는 여러 PAUL 매장이 그런 것 같지만, 북역에 있던 곳도 따로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테이크 아웃 형식의 매장이었던 터라 나는 PAUL에서 바게트 샌드위치를 하나 산 다음 북역에 있던 또다른 식당 겸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만 따로 주문한 뒤 자리에 앉았다.
서비스는 엉망이었으나 커피 맛은 상당히 좋았다. 마키야또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도 그 맛이 생각날 정도로 좋았다. 샌드위치와 곁들어 먹는 맛은... 사실 다른 곳에서 사온 샌드위치여서 조금 눈치가 보이기도 했고, 또 역 분위기가 그리 좋지도 않아서 제대로 음미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 카페에 있던 창을 통해 바로 역밖의 풍경을 내다볼 수 있었고, 또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기에 나름대로 낭만이 느껴지는 점심 식사이기는 했다.
점심을 그렇게 해결하고 카페 밖으로 나와 보니, 내가 탈 기차는 아니지만 같은 종류이기는 했던 탈리스가 바로 앞 플랫폼에 서 있었다. 탈리스는 바로 저 양옆으로 보이는 빨간색 기차인데, 파리와 브뤼셀, 암스테르담, 쾰른 등을 운행하는 고속열차이다. 프랑스 고속열차인 TGV와는 별도로 운영되는 기차이고, 유레일 패스가 있어도 예약비가 몇만 원을 훌쩍 넘을 정도로 비싼 기차이지만, 유로스타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한참 전에 한국에서 예약하고 갔던 터라 큰 부담 없이 탈 수 있었다.
맛있고 긴 바게트 샌드위치를 먹긴 했지만, 기차를 타고 브뤼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도 꽤 걸릴 것 같고 고되기도 할 것 같아서 다시 PAUL에 들러 초콜릿 빵을 하나 샀다. 이것 역시 맛이 좋았다. 알아보니 한국에도 PAUL 매장이 있다고는 하는데... 가보진 않았지만 가격이 상당히 비쌀 것 같다. 현지 가격으로 들여왔더라도 체감 물가는 이곳이 훨씬 비싼 편일 텐데, 그보다 조금 더 비싸게 팔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래도 파리에 있는 내내 애용했던 터라, 한국 매장에도 한 번쯤 방문해서 이것저것 사서 먹어보고 싶기는 하다.
탈리스는 유로스타보다 훨씬 쾌적한 기차였다. 객실부터 화장실까지 전부 다 깔끔했고, 또 기차의 외부와 내부 모두를 장식하는 그 특유의 적갈색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와이파이가 객실 내에서 된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유료였다는 게 아쉬웠으나... 무료 와이파이까지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 같긴 하다.
파리에서 브뤼셀까지는 1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그만큼 기차도 빨랐고, 구간 자체도 긴 편은 아니더라. 프랑스와 벨기에 사이의 국경을 넘어갈 때에는 듣던 대로 아무런 입국 심사 절차가 없었다. 다만 벨기에로 자동로밍이 되며 휴대전화에 안내 문자메시지가 떴을 때 국경을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렇듯 흐릿한 국경을 이때 처음으로 체험했기에, 벨기에에 도착해서, 혹은 그곳을 돌아다니며 비로소 런던과 파리에서는 좀처럼 실감할 수 없었던 '유럽'을 실감했던 것 같다.
브뤼셀 미디역은 파리 북역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그야말로 국제적인 유럽의 도시에 걸맞은 깔끔하고 세련된 역이었다. :) 하지만 오래된 멋 같은 것을 느낄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파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호스텔로 숙소를 예약해뒀던 터라, 브뤼셀부터 다시금 고생길이 열린다고 생각했다. 여행 전과는 달리 막상 런던에 도착해서 보니 호스텔의 환경이 너무 별로였고, 오히려 별로일 것으로 여겼던 민박집은 상당히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 우려는 벨기에 호스텔에 도착하고 나자 거의 다 사라졌다. 벨기에에서 묵었던 호스텔은 Brussels Hello Hostel이었다. 이곳은 런던의 호스텔과는 달리 그리 큰 호스텔이 아니어서 분위기도 더 아늑하게 느껴졌고, 리셉션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더할 나위 없이 친절했고, 로비와 식당에서는 와이파이가 무료로 제공되었으며, 아침 식사도 마찬가지로 숙박비에 포함되어 있었다. :) 모든 것에 추가로 돈을 내야 했던 런던의 호스텔과는 달리 이런 무료 서비스가 넘쳐나는 공간이 조금 놀랍고 또 고맙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숙소의 시설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관리 자체가 그리 청결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이 부분은 확실히 개선할 여지가 많아 보였다), 현대 화가의 작품이 방마다 걸려 있고, 침대나 탁자, 의자 같은 것은 모두 IKEA 제품이었기에 여러모로 인상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추천할만한 호스텔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브뤼셀이 워낙 작은 도시이기는 하지만, 이 호스텔은 다소 외곽 지역에 있어서 시내 중심가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3-4 정거장 정도를 가야 했고, 무료로 제공하는 아침은 그야말로 값싼 빵 몇 개에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밍밍한 시리얼 한 종류 정도가 전부였고, 또 침대의 매트리스나 베개도 다소 푹 꺼지는 면이 있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잠을 이루기가 불편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 요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호스텔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샤워실이나 화장실의 수가 넉넉하기도 했고, 또다시 말하지만 리셉션의 직원들이 참 친절했기 때문이며(심지어 여자 직원은 지금도 생각이 날 정도로 예쁘기까지 했다), 또 여러모로 분위기가 조용하고 안정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호스텔에서 파는 맥주도 다른 곳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저렴한 편이었던 터라 굳이 마트까지 가는 불편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시내 외곽이라고는 하지만 근처 지하철역에서 정말 걸어서 1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기에 실질적으로 걷는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특히 브뤼셀 미디역까지 향하는 노선에 바로 이 호스텔이 있는 역이 있어서 큰 짐을 들고 이동하는 데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내가 이곳에서 예약한 방은 2인실이었다. 호스텔에 2인실은 호텔에 있는 2인 전용 더블룸의 형식이 아니라면 없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벨기에에는 이런 방이 있는 호스텔이 제법 있는 듯보였다.
방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짐을 풀고, 간단히 씻고, 잠시 쉬고 난 다음, 호스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지도를 한 장 받고 밖으로 나갔다.
걸어서 브뤼셀 중심부까지 쭉 걸어서 가보았다. 얼추 3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하루에 한 번 정도는 걸을만한 거리였지만, 계속 다니기는 어려울 듯 보여서 나중에는 3일 교통권을 사서 편하게 다녔다. 하지만 걷는 것을 좋아한다면 주변이 그리 음산하지 않은 편이니 걸어 다녀도 나쁘진 않을 것 같더라.
간단히 저녁을 먹고, 브뤼셀에서 가장 유명한 광장이자 관광지인 그랑 플라스 한 곳만 둘러보고, 가는 길에 주변 지리를 익힌다는 생각으로 나갔던 것이었기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래도 초행이어서 길을 살짝 헤매긴 했다. 근데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보니 매우 친절하게, 그것도 유창한 영어로 길을 설명해주더라. 파리에서 생존식 불어로 겨우겨우 살아남았던 나에게 브뤼셀은 그야말로 숨이 탁 트이는 공간이었다. 내가 영어를 그만큼 잘하고 또 그에 걸맞은 대화상대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여행에 필요한 정보를 내가 아는 언어로 얻는 데 불편함이 전혀 없는 곳처럼 여겨져서 그러했다. 사실 여행자가 원하는 정보라는 것은 단순하기 마련이고, 그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도 그리 거창할 것은 없지 않은가. 그런 측면에서 파리는 참 여러모로 어려운 곳이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
브뤼셀도 파리와 마찬가지로 날이 살짝 흐린 상태였다.
꽤 오래 헤맸던 터라 그랑 플라스로 가는 방향 안내 표지를 보니 반가웠다.
사진으로는 그랑 플라스 주변의 오래된 건물만 담았던 터라 잘 전해지진 않겠지만, 브뤼셀은 한국의 중소 도시에 파리를 이식시켜놓은 듯 약간 삭막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인상을 풍기는 도시였다. 대형 타워 크레인을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점도 그렇고, 성인 섹스숍이 유난히 눈에 잘 띄던 것도 그렇고(그런 곳은 한결같이 'PARIS'라는 고유명사를 가게명칭에 포함하고 있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그리 예쁘다는 감상이 드는 도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브뤼셀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 모든 요소에도 굴하지 않고 특유의 잔잔한 분위기가 잘 유지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하나같이 단정하면서도 세련되었고, 수수하면서도 도회적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건강하게 보였다.
드디어 도착한 그랑 플라스.
실제로 보니 과연 그 명성에 걸맞게 멋진 곳이었다.
이런 것도 있었고.
이 동상은 예수 그리스도 같았다. 직접 만지면 행운을 얻는다는 얘기가 있는 것인지 내막은 잘 알 수 없었지만 다들 머리 부분을 만지고 갔다.
나는 벨기에가 정말 좋았다.
식당도 많고, 파리에 비하면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고, 또 뭐든지 그 규모가 적당해서 한눈에 파악하기도 쉽고...
그랑 플라스는 특히 매우 마음에 들었다. 역시 여행자는 처음 간 곳이라면 어설프게 현지인이 즐겨 찾는 장소를 둘러볼 게 아니라 그냥 일반적인 관광지를 둘러보아야 하는 것 같다. 그편이 보통 더 쉽고, 재밌고, 만족스럽다.
파리보다 역한 냄새도 덜 나고, 예쁜 사람도 더 많고, 초콜릿과 와플 가게는 말할 것도 없이 매혹적이고...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쭉 보고 나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열심히 돌아다니다가 현지인으로 보이는 이들로 북적거리는 한 음식점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음식 가격 자체는 적당했지만 물 가격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싸서 계산할 때 괴로웠던(당장 돈이 나가는 것보다도 바가지를 쓰는 일이 그런 것이라는 깨달음 탓에..), 하지만 음식 자체는 맛있던 곳이다.
위 메인음식은 바로 벨기에식 토끼 요리. :) 오리고기와 비슷한 맛인데 살이 조금 더 쫄깃했던 기억이 난다. 오리나 닭고기 등은 요리를 잘못하면 비린내 같은 게 심하게 나는 편이지 않나. 근데 이 토끼고기 요리는 비린내도 전혀 나지 않았을뿐더러 첫맛부터 뒷맛까지 깔끔하고 담백했다. 소스도 그리 짜지 않고 적당했던 것 같다. 감자튀김도 먹을만했고, 빵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맥주는 의도치 않게 생맥주가 아닌 병맥주를 시켜서 아쉽긴 했지만 이것은 메뉴를 제대로 못 본 내 탓이 크다.
저녁을 먹고 다시 그랑 플라스에 갔다.
브뤼셀 역시 런던이나 파리처럼 좀처럼 해가 질 줄 모르는 곳이었다.
그랑 플라스는 건물 하나하나가 웅장하면서도 아기자기했다.
그랑 플라스 주변 골목으로는 그야말로 벨기에에서 내로라하는 초콜릿 브랜드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외관상으로 끌렸던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들어가 보니 매장 안도 워낙 깔끔했고, 직원들도 다들 잘생기고 예뻐서 그야말로 넋을 잃고 둘러보았다.
수제 초콜릿 세 개를 따로 골라서 먹어보았는데, 그 맛도 일품이었다. 벨기에는 도대체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저 위 시계를 가만히 살펴보면 9시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오후 9시가 되었는데도 날이 이렇게 밝아서 이날 역시 야경을 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시간이 시간이었던 터라 형식적으로나마 불을 켜놓는 것 같았다.
불을 켜니 예뻤던 곳이 더 예뻐졌다.
조금 어두워졌음.
그랑 플라스의 야경은 사진으로 본 기억이 있었고, 또 실제로 한 번쯤 보고 싶었던 것이기에 나름대로 기다려보았는데 정말 해는 늦게 졌고, 주변에서 딱히 할 일은 없었고, 배가 부르니 따뜻한 곳에 눕고 싶어졌다.
앞서도 말했듯 날이 흐렸던 터라 원래 약간 쌀쌀한 감이 있었는데 날이 어두워지니 더 추워졌고, 해는 도무지 온전히 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다릴 수 있는 한 기다려보고 싶기도 했지만, 막상 기다렸는데 내가 기대했던 야경을 볼 수 없다면 몸도 마음도 파리에 있을 때처럼 무척 지칠 것 같았기에 그냥 숙소로 향했다. 제대로 된 야경은 못 보았지만, 그래도 그랑 플라스는 멋지게 다가왔다. 나중에 다시 간다면 그때에는 해가 일찍 지는 계절에 가서 실컷 야경을 보리라.
이렇게 첫 브뤼셀 일정이 끝났다. 벨기에와 브뤼셀은 첫인상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었기에, 파리에 있을 때처럼 그런 부분을 애써 좋아하려고 할 필요도 없었다. 파리에 있다가 와서 벨기에가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원래 벨기에 자체가 좋아서 좋았던 것인지 이때 이후로 계속 고민해보았는데, 역시 벨기에 자체가 좋아서 좋았던 것 같다. 나는 정말 벨기에(브뤼셀)의 거의 모든 면이 좋았다. 그 국제적인 도시로서의 느낌과 고풍스러운 유럽 도시의 느낌이 공존하는 가운데 현지인들은 자유롭고 건강한 분위기로 삶을 즐기는 듯 보였고, 관광객들은 브뤼셀의 화려하고도 근사한 식당과 카페, 초콜릿 상점과 와플 가게를 돌아다니며 그 소박하면서도 묵직한 여러 관광지를 즐기느라 정신이 없는 듯 보였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고, 또 그 중 하나가 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