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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 부코우스키의 책을 찾아서

아는사람 2009. 3. 15. 16:29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1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찰스 부코우스키 (바다출판사,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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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부코우스키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특별히 정해진 규범 없이 내키는 대로 책을 읽던 시기에, 도서관에서 어디 읽을만한 물건이 없을지 두리번거리다가 우연히 집어들게 된 빨간색 표지의 책이었습니다. 지금도 약간 그러한 성향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그때는 특히 광적이고 자극적인 것에 열광하는 성향이 더 두드러졌기에,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제목이나 그 자극적인 색의 겉표지가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그보다 더 눈에 들어왔던 것은 사실 그 책의 목차였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이쁜 처녀」부터 시작해서 「텍사스의 창녀촌」이라든지 「25명의 누더기를 걸친 부랑자들」, 「정치만큼 지저분한 것은 없다」, 「술친구」, 「하얀 음부」 같은 제목이 쭉 나열된 그 목차를 보고 있자니, 데카당스적인 호기심이 무럭무럭 자라났습니다.


그 책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의 작가는 바로 찰스 부코우스키라는 미국 작가였습니다. 1920년에 태어나 1994년에 죽은, 비교적 현대에 속하는 작가로서 "생전에 50권 이상"이나 되는 책을 남겼다는 설명을 열심히 들여다보았지만, 좀처럼 기억 속에서 그 작가의 이름을 찾기가 힘들더군요. 결국 제가 도서관에서 그 책을 집어들고 알 수 있었던 사실은 그 책이 조금 자극적인 소재를 다룬 단편소설집이라는 것뿐이었고, 제가 짐작할 수 있었던 사실은,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된 세계문학전집의 목록을 몇 번 훑어보았던 경험과 그 도서관에 비치된 그의 책이 오직 그 책뿐임을 종합적으로 검토해보았을 때 그 작가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주류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한 작가일 것 같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권위나 명성 같은 것은 책을 고르는 데 그리 중요한 기준이 아니었기에, 즉, 무엇보다도 '고전'을 먼저 찾아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그 당시까지만 해도 거의 없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책에 실려 있는 단편이 모두 어떠한 내용일지 궁금했기에,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 책을 빌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제가 받은 충격, 즉 인생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 연유를 설명하자면, 그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얼추 비슷한, 저의 개인적인 한계에 관해 간단히나마 언급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당분간은(어쩌면 평생)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때도 저는 그저 머릿속으로만 급진적이고 실질적으로는 부모의 양육에 거의 모든 것을 의지한 채 살아가는 사이비 무산자였습니다. 육체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을 동경하고, 대학교수니 의사니 검사니 하는 직업을 선망하는 중산층의 나약함을 지독히도 혐오했지만 실질적으로 공사판에 나가서 단 하루라도 일해본 적이 있다거나, 아니면 중산층의 안락함에서 벗어나고자 집에서 뛰쳐나와 독립한다거나 하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저 자신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체육 시간에 늘 뒤처지기만 했던 운동신경과 체력으로, 말주변이 있기는커녕 지독히 낯을 가리는 소심한 성격으로 무작정 밖에 나간다면, 생활에 적응해서 변화하기보다는 곧 포기하고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제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실패라기보다는 그러한 식의 '탕자의 귀환'에 있었고, 장정일 씨가 어디에선가 언급했듯 돌아온 탕자는 쳐죽여야 마땅하기에(극렬한 보수반동이 되기 쉽기에) 좀처럼 집 밖으로 뛰쳐나가지도, 제 신념을 바꾸지도 못한 채, 그저 자기 자신을 경멸하기만 하는 나날이 이어졌죠.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러한 제가 꿈꾸던 반항적인 생활과 일치하는 무엇인가가 더 거칠고 극단적인 형태로 구체화되어 있었고, 그 속에서 저는 현실을 잠시나마 뒤로 한 채 너무 달콤해서 무섭기까지 한 쾌락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편소설집이지만, 어떻게 보면 수필집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이 작품집에는, 작가가 다른 작품에서 인용하는 실제 경험이 제법 많이 소개됩니다. 여기에는 특히 그의 다른 작품에도 자주 등장하는 인물, 특별히 정해진 거처 없이 여러 일자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치나스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치나스키는 부코우스키의 또 다른 자아로 볼 수 있는데요, 무일푼이 되어 다른 사람의 집에 신세를 지면서도(「사랑스러운 연애 사건」), 정육공장에서 일하다가 하루 만에 그 일을 때려치우는 등(「정육공장의 키드 스타더스트」) 성실하고 근면한 면을 찾아보기 힘든 인물, 즉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 대다수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덕목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로 훌륭히 성공하는 것도 아니며(적어도 그 '성공'이라는 것이 살아생전 자국에서 출간된 책의 출판사가 얼마나 큰 곳이었는지, 그 책을 비평한 이들이 얼마나 권위있는 이들이었는지를 기준으로 판가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말이지요), 당연히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나가지도 못하지요.

그것이 부당한 일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났고, 사회적으로 평판이 높은 대학을 나오지도 못했고, 젊은 시절 여러 곳에 글을 투고했지만 중간에 그만두었으며, 그 후 스스로 방황하지 않고 지낼 여지가 있었음에도 부러 더 거친 생활을 택했기에, 그러한 실패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죠. 그러한 삶을 살았던 부코우스키의 문장은 우아하다기보다는 거칠고, 거칠다기보다는 극단적이지요. 즉, 삶뿐만 아니라 글 속에서도 분명히 여러 결함을 지닌 작가인 셈입니다. 하지만 결함이 없는 작가가 어디 있을까요. 중요한 사실은 그의 결함이 작가로서의 결함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체제에 종속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다가 생겨난 결함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부코우스키가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거기에 좌절하지 않고 살아간 이유는 애당초 그의 목표가 성공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실패를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실패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지도 않았던 셈이죠.

체제에 대해 전면적인 반기를 들었던 무정부주의자처럼 비치기도 하는 이 작가가 자라난 곳이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자유주의의 희망찬 상징을 탄생케 한 미국임을 상기해볼 때, 그의 철저히 패배자다운 삶은 신비롭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필연적으로도 보이기도 합니다. 마약을 제외하고라면, 부코우스키는 흔히 사회에서 '나쁘다'고 일컫는 거의 모든 것에 손을 댄 채 죽을 때까지 그러한 것에서 손을 떼지 않았습니다. 술, 담배, 경마, 사창가……. 그의 소설은 그러한 그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맥락에서 어쩔 수 없이 퇴폐적인 분위기가 감돌며, 그것이 영리한 계산이나 사회학적 고찰을 반영한 결과물이라고 보기도 힘듭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경험한 삶을 날 것 그대로 서술할 뿐이고, 거기에 진보적인 면모가 있다면 바로 그러한 기록이 별다른 과장 없이 진솔하게 그러한 삶을 반영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가 사창가에서 착취당하는 여성을 옹호하거나 힘겨운 노동의 대가로 적은 임금을 받으며 살아가는 중남미 이민자를 대변하는 모습을 찾아보기란 무척 어렵지만, 당대에 그만큼 그들과 유사한 생활 속에서 살아가며 그것을 기록해낸 작가 역시 찾아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국내에 발간된 부코우스키의 책은 제가 아는 바로는 얼추 네다섯 권 정도 있습니다.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와 거의 비슷한 목록의 단편을 수록한 『미친 시인의 사랑』이라는 책이 1993년에 발간된 적이 있으며, 그 밖에도 『시인의 여자들』이라는 제목으로 『Women』이라는 작품이 문학사상사에서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고, 2년 전쯤에는 <삶의 가장자리Factotum>라는 영화가 개봉하면서 그 원작소설인 『팩토텀』을 문학동네에서 선보이기도 했지요. 제 생활양식은 사이비 무산자의 그것에서 좀처럼 바뀌질 않았기에 부코우스키를 향한 관심 역시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그 결과 시립도서관·학교도서관·인터넷 헌책방·인터넷 서점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국내에 번역되어 나온 부코우스키의 책을 거의 다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밖에도 번역되지 않은 50여 권이 넘는 부코우스키의 책 중 일부는, 직접 아마존이나 교보문고를 통해 원서를 사서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굳이 그렇게 원서까지 사서 부코우스키의 책을 찾아보았던 이유는 그만큼 부코우스키의 삶에 매료되었던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어떠한 책을 찾건 간에 완전히 만족하기가 힘겨웠기에 그랬습니다. 왜 그런 것인지 고민하다 보니, 결국 문제는 부코우스키가 아니라 부코우스키의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책이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부족한 영어실력으로나마 부코우스키의 원서를 읽으면서 깨달았던 바는,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훌륭한 번역물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부코우스키의 언어를 원문보다도 더 생생하게 옮겨냈다는 측면에서 특히 그러했죠. 저는 결국 그보다 부족한 번역, 혹은 그보다 부족한 다른 작품에 계속 실망하며, 제가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건 간에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만을 찾아 헤맸고, 도서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그 책을 시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기에 늘 다른 책을 통해 대리만족하려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 하나.『The Most Beautiful Woman in Town』과 『Tales of Ordinary Madness』중 어느 책이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의 원서일까요? 정답은 첫 번째 책입니다. 두 권 다 실제로 존재하는 책이고요. 원래 『Erections, Ejaculations and General Tales of Ordinary Madness』라는 제목으로 처음 선을 보였던 책이 나중에 그 두 권으로 나뉘어 출간된 것이고, 국내 번역자 김철인 씨는 그러한 점을 고려해서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제목 끝에 "그 첫번째"라는 단서가 붙은 것 역시 "분책된 두번째 책인 『Tales of ordinary madness』도 조만간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 그 두번째』로 번역해 소개할 예정"이었기 때문인데요, 불행히도 책 판매가 생각만큼 안 되었던 탓인지 첫 번째 책만 나왔고, 그 책마저 지금은 절판된 상태입니다. 이 책을 출간한 바다출판사에 전화를 걸어서 재고가 있는지 알아보기도 했지만, 없다고 하더군요. 국내 포털사이트로 '부코우스키'를 검색해보면 예전보다 매니아층이 더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잠재적으로 부코우스키라는 작가에 열광할 만한 독자층도 꽤 있는 것 같은데, 그 인원이 출판의욕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소수인 것 같아 반갑기도 하고 아쉽기도 합니다. 첫 번째 책을 재출간하는 것과 동시에, 같은 출판사에서 동일한 번역자가 일상의 광기에 대한 두 번째 이야기를 소개해준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저는 다행히도 최근에 한 헌책방에서 상태가 양호한 이 책의 초판을 구해서 예전만큼 거기에 대한 아쉬움이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러한 일이 생긴다면 다시 첫 번째 책을 구매할 의사마저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바다출판사 관계자 분이 보고 계신다면, 참작해주시길…….

비정규직이 대책 없이 넘쳐나는 이 땅에서, 그것도 전 세계의 경제가 휘청거리는 이 시점에 중산층의 안정된 삶을 경멸하는 태도는 부적절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은 빵만으로 이어나갈 수 없다는 생각은 그러나 어느 시대에건 유효하지 않을까요. 현재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것보다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회의하며 헤쳐나가는 것, 안주하는 대신 유랑하는 삶이 시사하는 바는 이러한 시대에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를 끝까지, 어떻게 보면 상당히 단순무식한 형태로 추구한 작가. 입만으로 패배자의 삶을 예찬한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삶을 살아간 작가. 나이를 먹을수록 그 작가의 삶을 향한 동경은 줄어드는 편이지만, 그 삶을 끝까지 살아내어 기록해낸 작가를 향한 존경은 점점 더 커지네요. 그는 한 명의 작가이기 이전에, 가장 자극적이고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자유로운 삶을 보여준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한 명의 잡역부Factotum이자 부랑자로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