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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오에 겐자부로를 처음 만난 것은 일반적으로 독자가 작가를 처음 만나는 방식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작품을 통해 작가를 만나기 이전에, 작가의 실물을 먼저 접했던 것이지요. '지구촌' 시대에 한국의 독자가 이웃나라 일본의 작가를 먼발치에서 실물로 본다는 것은 사실 그리 드문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노년에 접어든 오에 겐자부로가 직접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를 만났다는 것은 그래도 소중히 추억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때는 2005년 5월, 대산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서울국제문학포럼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을 당시였습니다. 국내외 유명작가가 이 포럼에 참석하고자 서울을 방문했는데요, 그 방문자 중에 오에 겐자부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저 역시 그 중 한 명으로서 포럼에 참석했을 리는 없고요, 인터넷 교보문고를 이용하다가 우연히 그 포럼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 한 명의 평범한 독자로서 참석하게 되었지요. 포럼이 어떠한 것일지 궁금하기도 했고, 또 유명한 작가를 실제로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그러한 일을 경험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습니다.
총 3일에 걸쳐 진행되었던 포럼 일정 중 오에 겐자부로의 발제는 첫째 날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포럼에 찾아갔던 것 역시 바로 그날이었지만, 오에 겐자부로보다는 『조서』의 작가 르 클레지오나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를 보고자 찾아갔던 것이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과적으로는 오에 겐자부로의 발제만 듣고 집으로 돌아왔지요. 오에 겐자부로의 발제 자체에 문제가 있던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무더운 날에 그리 시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세종문화회관 컨벤션센터 안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조금 힘들기도 했고, 발제문이 수록된 책자를 얻고 나니 남아있으려는 의욕도 사라져서, 애당초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가장 첫 순서였던 오에 겐자부로의 발제만 듣고 나왔던 것입니다.
발제자로 나선 오에 겐자부로를 처음 보았을 때,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던 저로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그의 발제는 무척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포럼에서 흔히 발표되는 글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지 못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당시 저에게 포럼이라는 곳은 여러모로 약간 경직된 형태의 글이 발표될 수밖에 없는 자리로 보였는데요, 오에 겐자부로는 [평화를 위한 글쓰기]라는 묵직한 주제에 함몰되거나 그 주제를 간과하지 않은 채 소소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발제문에 담아낸 것으로 보였고, 그래서 더 좋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오에 겐자부로가 발제하기에 앞서 자신의 책을 출판해준 한국 출판사에 사과 겸 감사를 표했을 때, 그러한 측면이 두드러졌다고 여겨집니다. 그 사과 겸 감사라는 것은 보통 진지한 연설에 앞서 가볍게 분위기를 돋워주는 농담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잘 팔리지 않는 자신의 책을 출판해준 한국 출판사에 사과하고 또 감사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죠. 그렇듯 진지한 자리에서 진지하게 보이는(얼마든지 그래도 이해가 가는) 한 작가가 자신을 소재로 그러한 우스갯소리를 재밌게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 그의 책이 잘 팔리지 않는 것인지 그 사실 여부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습니다만, 포럼이 끝난 다음 시립도서관에 가서 그의 책을 찾아볼 때는 은근히 신경이 쓰이더군요. 꽤 여러 권이 비치되어 있던 그의 책 중에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장 흥미롭게 보이는 제목의 책을 골랐습니다. 『개인적 체험』이 바로 그 책이었죠. 그 당시 남겨놓은 독후감이 없어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다음 그가 정말 '안 팔리는' 작가라면 도대체 왜 그러한 것인지 의아해했던 사실은 제법 뚜렷이 기억납니다. 그만큼 작품이 흥미로웠던 것이죠. 도대체 '잘 팔리는' 기준이 무엇일까 싶더군요.
시중에 새책으로 유통되는 오에 겐자부로의 책은 꽤 있는 편입니다.『만엔원년의 풋볼』같은 대표작은 최근 다시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2005년 서울국제문학포럼 당시 집필 중임을 밝혔던 그의 장편 3부작(『체인지링』, 『우울한 얼굴의 아이』, 『책이여, 안녕!』) 역시 모두 번역되어 나온 상태이며, 산문집은 꽤 여러 종류로 출간되어 있지요. 하지만 그렇듯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책을 제외하고라면 절판된 사례가 많은데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그가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당시 급조된 여러 번역물이 무척 많았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그 번역물 대부분이 현재 절판된 상태임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죠.
각종 문학상이 넘쳐나고 그 수상작이 출판물로 인기가 높은 현 상황에서,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책만큼 안전한 장사거리도 없을 겁니다. 요즘에는 그래도 예전처럼 여러 출판사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책을 쏟아내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노벨문학상 발표시기에 맞춰 그 작가의 책이 새로 출간되는 것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번역한 책이 쏟아지고, 문학상 이슈가 사그라질 때쯤 기다렸다는 듯 출간을 중단하는 일은 얼마든지 어쩔 수 있는 일일 겁니다.
아무리 오에 겐자부로가 '잘 팔리지 않는' 작가이고 또 헌책과 잘 어울리는 외모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일반 책방에서보다 헌책방에서 그의 책을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면 그렇게 달가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책이 쉽사리 절판되는 것을 막으려면 두터운 독자층이 우선하여 생겨나야겠지만, 출판사에서 시류에 편승하는 대신 조금만 더 멀리 보고 책을 내놓는 것만으로도, 불필요한 절판 도서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헌책방에서 구한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 체험』과 일반 서점에서 구한 『책이여, 안녕!』을 앞에 둔 채, 시장논리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한 명의 무력한 독자로서, 그러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