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독서

모든 책은 헌책이다(최종규) - 헌책이란 무엇인가?

아는사람 2009. 5. 1. 09:48


모든 책은 헌책이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최종규 (그물코,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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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관련 키워드로 검색엔진을 이용할 때면 자주 마주치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 이름의 주인공은 바로 한겨레, 오마이뉴스 등 여러 언론매체에 헌책방 기사를 쓰고, 헌책방 관련 서적까지 펴낸 분인, 최종규 씨입니다. 제가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책 『모든 책은 헌책이다』 역시 바로 최종규 씨의 책이고요.


처음 최종규 씨의 글을 인터넷으로 접했을 때 저는 막연히 나이가 많은 분이리라 생각했습니다. 경어체로 쓴 글, 헌책방에 관해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짐작한 결과였죠. 실제로는 비교적 젊은 분입니다만(30대 후반 정도입니다), 그러한 추측을 하게 된 이유를 굳이 더 찾아보자면 무엇보다도 헌책이라는 단어에 관해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최종규 씨가 금호동 [고구마] 헌책방에 다녀와서 남긴 글에는 헌책이라는 단어가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보게끔 하는, 무척 흥미로운 일화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책값 500원도 안 깎아 준다고(사실 깎을 만큼 비싼 책도 아니었기에. 1000원짜리 책을 500원에 달라 하니) "평생 헌책방이나 해 먹어라" 하고 욕을 내뱉고 간 아줌마가 있었답니다. <고구마> 아저씨는 헌책방 일을 평생 보람이자 즐거움으로 여기며 살 분인데 "평생 헌책방을 해라"는 말은 덕담인지 욕인지 모를 말입니다. 다만, 이런 말을 곰곰이 짚으면 우리 사회가 그만큼 헌책방 임자들을 푸대접하거나 깔보는 눈길이 참으로 깊음을 새삼스레 돌아볼 수 있습니다.


-최종규, 『모든 책은 헌책이다』, pp.285-267 



당시 [고구마]에 방문한 아줌마가 그 덕담인지 욕인지 모를 말을 퍼부은 것은 순전히 그 아줌마의 몰상식함 탓일까요?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전적으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보다 오히려 엉뚱한 곳에 숨어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헌책방이 헌책방이기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던 것일지도 모르죠. 이 말은 역설 같지만 역설이 아니에요. 헌책방이 그냥 책방이 아니라 '헌'책방이라는 데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헌책은 헌 물건, 즉 고물과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렇기에 헌책방은 고물상과 비슷한 인상을 줄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비치기도 하는 공간이고요. 헌책방에 있는 헌책은 그러므로 누군가가 예전에 가지고 있던 책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내다버린 책으로 인식되는 일이 더 흔하겠죠. 그럼 생각해봅시다, 과연 버려진 물건을 살 때 비싼 가격을 기꺼이 주고 살 사람이 있을까요? 반면에 누군가가 예전에 사용했으나 아직 쓸만한 중고제품은 어떠할까요, 이것 역시 아무리 상태가 좋아도 가격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제품일까요?


저는 헌책을 oldbook으로 직역해서 제 블로그 주소로 삼았습니다만, 실제로 영어권 국가에서 헌책은 second-hand book 혹은 used book이란 표현으로 일컬어진다고 합니다. 즉 헌책이 아닌 중고서적으로 일컬어지는 것이죠. 최종규 씨 역시 『모든 책은 헌책이다』에서 이러한 측면을 지적하며, 재치있고 정확한 문장으로 헌책이란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풀이합니다.

 

(…) '헌책'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렇게 풀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헌책이란, '누군가가 읽거나 보며 사람 손을 거친 책 가운데 상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책이거나, 사람 손을 거치지 않았지만 새책방에서 더는 팔 수 없는 책이거나, 책값을 안 붙이고 만든 책(비매품) 가운데, 처음 붙은 책값에는 얽매이지 않고 헌책방마다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값을 붙여서 파는 책'이라고요.


-최종규, 『모든 책은 헌책이다』, p.28


 

헌책은 그저 단순히 낡아서, 쓸모없어져서 버려진 책만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고구마]에서 500원 책값에 화를 내셨던 아주머니가 헌책에 관해 지녔던 생각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겠지만요.


헌책의 사전적인 의미가 그렇다면, 다른 의미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규 씨는 그 다른 의미에 대해서도 여러 멋진 생각을 정리해놓았습니다. 최종규 씨에 의하면 헌책이란, "어느 곳을 가더라도 다 다른 모습으로 만나는 책"이고, "비싼 찻삯을 치르고 품과 시간을 들이면서도 책 한 권을 찾으러 먼 나들이를 떠날 수 있도록 이끄는 책"이며, "두 손과 얼굴, 옷과 몸에 책때와 책먼지를 잔뜩 묻히면서도 씩 웃으면서 고를 수 있는 책"이고, "세상에 딱 하나뿐인 책"이기도 하며, "어떤 책 하나를 읽고 만지고 다루고 즐긴 사람들 손길과 흔적이 남아 있는 역사", "옛사람들 발자취를 거슬러올라가면서 살필 수 있는 터전", "어떤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모습과 느낌을 간직한 자취"(이상 모두 pp.56-57에서 인용)입니다.


이 책의 제목 "모든 책은 헌책이다"는 결국 모든 책은 낡기 마련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책은 다 다르고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뜻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책은 훌륭한 헌책방 입문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측면으로도 얼마든지 좋게 받아들일 수 있어요. 최종규 씨의 [헌책방 나들이]를 통해 평소에는 접하기 힘든 여러 책을 소개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흔치 않은 독서록이고, 사회의 부조리를 질타하는 동시에 소박한 사람의 이야기 역시 잘 담아냈다는 측면에서 인상적인 수필이며, 될 수 있으면 순 우리말로 글을 쓰고자 한 저자의 노력이 담겨 있다는 측면에서 준수한 글쓰기 교본이기도 합니다.


헌책방에 관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이제야 이 책을 읽은 게 아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제라도 읽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새책으로 사서 읽었는데요, 안타까웠던 점은 책이 그리 많이 팔리지 않은 것인지 2004년에 초판이 나온 책임에도 제가 올해 주문해서 받은 책 역시 같은 해에 나온 2쇄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15,000원으로 나온 책이니 가격이 부담스러워서 판매가 부진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최종규 씨의 이 헌책에 관한 책을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는 것은 아닐지 걱정도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재밌을 것 같기는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