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말 청계천 인근 헌책방 골목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무척 설렜던 기억이 납니다. 『88만원 세대』를 읽어보지 않았더라도 그 용어에 익숙한 이들이 이미 많았을 만큼 이 책의 여파가 거셌던 시점이었죠.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를 거둔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기도 했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검증된 고전, 혹은 제가 좋아하는 문학이나 철학 분야의 저자가 내놓은 책만 사서 읽는 경향이 있던 저로서는, 생소한 이름의 저자가 낸 사회과학 분야의 책을 선뜻 살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의 도서관에는 아직 이 책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고요. 20대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며 이곳저곳에서 추천하는 것을 들어온 터였는지라 저 역시 읽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만, 새 책으로 사기에는 약간 부담스러웠던 차에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었죠.
사회과학 분야의 서적을 구해서 읽은 게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강준만 씨가 꽤 오랫동안 펴낸 시사지 『인물과 사상』 과월호도 사서 읽어보았고, 진중권 씨의 『시칠리아의 암소』를 읽고 안티조선일보 운동처럼 전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사회문제를 파악하기도 했죠. 홍세화 씨의 저작은 워낙 유명해서 사회과학이라는 분야 자체를 알기 전에 여러 권 읽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전까지 접한 서적이 다 자그마하게 보일 정도로, 이 『88만원 세대』는 충격적인 책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은 '88만원 세대'를 핵심으로 한, 한국경제 대안론으로 볼 수 있습니다. 88만원 세대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낸 게 바로 이 책이죠. 현재 10대를 포함하여 20대 후반까지의 세대 중 95%가 앞으로 취직해서 받게 될 평균 월급이 88만원에 그칠 것임을 선고하는 저자는 어떻게 해서 88만원 세대가 생겨났는지, 이 문제를 어떠한 식으로 해결해야 하는지 논의하는 장을 마련합니다.
다소 뻔한 문제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이 책은 절대 뻔하지가 않습니다. 뻔하다고 생각했다면 전율을 느낄 수밖에 없죠. 그만큼 충격적이고 무서우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한국의 10대와 20대 중에서 상위 5%를 제외한 전 세대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다는 말을 상세한 통계와 논증으로 뒷받침한다면, 수험지옥에서 살아가는 중고등학생부터, 취직걱정에 시달리는 20대, 그리고 그러한 20대를 자식으로 둔 부모까지, 다 조금씩은 무서워할 법하지 않겠습니까? 이 책의 저자 우석훈 씨에게는 그래서 '공포경제학'을 한다는 얘기가 따라붙곤 합니다. 반면, 무서운 만큼 재밌기도 하죠. 괴테의 시와 디킨슨의 소설을 인용하는 이 흥미진진한 산문집은, 단순히 재밌는 게 아니라 한 번 잡으면 도저히 책에서 손을 떼기가 힘들 정도로 재밌습니다.
정신없이 이 책을 읽고 난 후, 금단증세에 시달리는 헤로인환자처럼 한동안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납니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바로 그러한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여태껏 믿어왔던 세상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며, 어두침침하고 차가운 우주선에서의 삶이 진짜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심정. 자기 세대의 특권층에 속한 이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개미지옥에 자신이 놓인 줄도 모르고 엘리트주의를 자처했던 무지하고 평범한 20대가 느끼는 자괴감.
참으로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곧 용기를 얻었죠. 결국 투쟁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에 있는 우석훈 씨의 다른 저작을 찾아보기도 했고(다른 저작 역시 무섭고 좋더군요), 올해 4.19 총선 때 진보신당에 한 표를 던지기도 했죠. 촛불집회가 열렸을 때는 적어도 마음만으로는 열렬히 동참하려고 노력했지만 실제로 참석하지는 못했죠. 그 빚을 갚는 뜻에서, 저번 달에 진보신당에 당원으로 가입하기도 했습니다.
『88만원 세대』는 이렇듯 제 삶에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여전히 저는 정치·사회적으로 그리 열정적인 편은 아닙니다. 그만큼 무지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88만원 세대』이후, 지금처럼 과열된 민족주의와 신자유주의에 휘말린 채 타성에 젖어 사는 이들이 '다수'가 될 때 기대할 수 있는 미래가 어떠한 모습일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기에, 가만히 있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불평등이 더더욱 심화된 세상, 중산층이 몰락하는 세상, 서민과 귀족으로 온 국민으로 철저하게 분류되는 세상. 그러한 세상은 싫습니다. 제가 진보이고 좌파여서 그런 게 아니라(오히려 제 성향은 보수에 가깝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부당하게 여겨져서 그렇습니다. 남을 착취해서 자신을 배불리 하는 일이 정당하다면, 도대체 부당한 일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게다가 그런 일은 다수의 파멸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88만원 세대』, 『조직의 재발견』,『촌놈들의 제국주의』, 『괴물의 탄생』, 이렇게 총 4권으로 구성된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 중 첫 번째 책은 헌책방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책은 도서관에서 구했습니다. 네 번째 책은 새책방에서 샀고요. 생각해보니 절묘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헌책방은 이렇듯 금전적인 부담을 덜어주며 정신적인 부담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자주 맡곤 합니다. 개인적으로 헌책방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