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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마광수) - 헌책으로 만난 마 교수

아는사람 2008. 12. 6. 14:26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마광수 (자유문학사,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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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마광수 (리뷰앤리뷰,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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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개그콘서트>가 밤 9시로 시간대를 옮기기 전만 해도 [봉숭아학당] 코너에는 박성광 씨가 맡았던 '박 교수'라는 캐릭터가 있었습니다. 뿔테 안경에 바바리코트를 입은 채 등장해서 처음에는 교수님답게 덕담 비슷한 것을 늘어놓다가 나중에는 결국 야한 얘기를 하며 외마디 탄성(?)을 지르곤 하던 캐릭터였죠.

이 '박 교수'는 원래 '마 교수'였습니다. 야한 것을 밝히는 마 교수, 하면 아무래도 마광수 교수를 연상할 수밖에 없겠죠. 실제 모델도 마광수 교수였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한 인터뷰 기사에서 마광수 교수가 자신을 소재로 삼은 듯한 이 '마 교수'가 불쾌하다고 토로한 적이 있었죠. 그 영향 탓인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박성광 씨는 '박 교수'로 성을 바꾸었고요.

성의 자유를 외치는 국문학 교수, 마광수는 성 담론에서 끝없이 '자유'를 울부짖습니다. 그 자유라는 것의 실체는 어떻게 보면 우리도 동물처럼 마음껏 짝짓기할 수 있게 해달라는 얘기로도 들리지만, 점잖게 보자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에 관한 엄숙주의를 깨버리자는 외침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죠.

『즐거운 사라』를 발표하고 나서 92년 '음란문서 제조 혐의'로 재판까지 받은 마 교수는 몇몇 지식인을 비롯한 문인들의 지지를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그와 유사한 이유로 재판을 받았던 장정일 씨와도 그래서 인연이 닿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설가 하일지 씨는 그 사건 이후 공개적으로 그를 옹호함으로써 친한 사이가 되었다고도 하지요.

이러한 얘기를 어디에선가 듣고 나니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기회가 되면 마광수 교수의 저작을 한 번 찾아서 읽어보자고 결심했죠.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장정일 씨의 저작과는 달리 마광수 교수의 책은 그리 쉽게 찾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 『즐거운 사라』가 그러했죠.

마광수 교수의 책을 찾고자 헌책방으로 떠났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4년 전쯤으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 알아본 바로는, 『즐거운 사라』는 여전히 판매금지 상태에서 풀려나지 않은 터라 재출간은 불가능하고, 헌책조차 찾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찾아갔던 것이었지만 역시나 하는 결과만 있던 것이죠. 유독 그 책만 없더군요. 하지만 그의 다른 저작은 제법 있었습니다. 그때 구해온 책이 바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제목의 산문집이었습니다.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제목에서 '야한'은 마 교수의 새로운 정의로 해석하자면, '야(野)한,' 즉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유롭게 드러내는 것을 가리키는 수식어라고 합니다. 이 사회의 경직성을 꼬집으려는 그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겠지만,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한 나라에서 지식층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사람이 내놓은 책 제목이기에, 여성주의를 배척하는 몰상식의 혐의에서 벗어나기가 힘들고, 또 그 책임을 그에게 물어도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가 책 속에서 외치는 자유는 전반적인 '성의 자유'보다는 '남성의 자유'인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당시 저는 그러한 부분을 크게 자각하지 못한 채 그저 솔깃한 얘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성적으로 억눌린 사춘기 소년에게, 성적으로 억눌린 것은 순전히 이 경직된 사회 탓이라고 말해주는 아저씨가 나타나 손을 내민다면 어느 정도는 반가울 수밖에 없겠죠. 특히 그 소년에게 비판적으로 사고할 능력이 부족하다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고요. 마 교수 아저씨는 그래서 참으로 매력적이었죠. 사랑을 예찬하는 예술가, 그 사랑을 더 완전하게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하는 저항의 시인, 그리고 강단에서 젊은 지성을 향해 이러한 얘기를 들려주는 교육자! 

비록 길고 긴 손톱에 대한 그의 애착 같은 부분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별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소설 『불안』은,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읽고 그에게 느낀 연대감으로 다시 헌책방에 찾아가 샀던 책이었습니다.

가끔, 소수자를 옹호하자는 진보의 취지가 악용되는 일이 생겨나곤 합니다.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고통받는 사회적 소수자를 옹호하는 대신, 단지 수적으로 소수일 뿐인 실질적 다수를 '소수를 위한 변명' 격으로 옹호하는 행위. 한나라당에서 부자에게만 세금을 많이 물리지 말라며 종부세 폐지를 주장하는 일 같은 게 바로 그 대표적인 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불안』을 읽고 나서, 마광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 논란 역시, 만약 그 소설이 『불안』과 비슷한 수준이라면, 어떠한 면에서는 이러한 왜곡된 소수옹호 논리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안』은 그리 훌륭한 소설로 여겨지지도 않았고, 성적으로 개방되었다는 인상보다는 개인의 페티시즘을, 현대소설의 작법이론을 어설프게 적용한 골격의 소설에다 구겨 넣은 작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재미도 없었고, 파격도 없었죠. 도저히 몰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음란소설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은 것은 물론 난센스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질서를 지키고자 사회에 물의를 일으킬 만한 일에 제재를 가한다는 논리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개인이 나름대로 소설이라는 창작물의 형태로 발표한 것을 그렇게 틀어막는다는 것은, 국가가 자신의 질서보다는 경직된 존엄성을 지키고자 힘을 행사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렇게 탄압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작품의 가치가 무조건 높아지는 것은 아니겠죠. 마광수가 이러한 사건을 겪었다고 그에 대한 평론집을 내놓고, 그를 추켜세우는 것, 그러한 행위는, 그 작품이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 아닌 이상, 왜곡된 소수옹호의 논리가 아닌가, 하는 겁니다.

KBS 측에서 <개그콘서트>의 방영시간대를 9시로 옮겼다는 이유로 '야한 것'을 말하는 캐릭터를 배제한 게 사실이라면, 마 교수의 엄숙주의에 저항하는 정신은, 그가 정당한 평가를 받았건 받지 못했건 간에 여전히 계승되고 이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 교수'라는 패러디를 참지 못하고 불쾌함을 토로한 마광수 교수 자신에게는 그러한 엄숙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일까요. 저항정신은 언제까지나 필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권위 역시 언제까지나 그에 뒤따르겠죠. 마 교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덧1. 『즐거운 사라』는 아직 판매금지 조치에서 풀려나지 않은 것 같군요. 검색해보니 원래 판매가격의 2배, 3배로 개인 간에 거래된다는데, 글쎄요, 책 자체가 희귀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은 그리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 헌책방에서 마주치게 된다면 충동적으로 구매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덧2. 간혹 문학 계간지 등에 나오는 그의 시는 나쁘지 않더군요. 그가 직접 책 표지로 쓰기도 하는 그의 그림 역시 괜찮고요. 몇 년 전에 제자의 글을 표절한 것으로 밝혀져 물의를 일으킨 사건처럼 여러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그의 모습을 살펴보자면, 어느 모로 보나 '훌륭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그를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는 마 교수가 좋은 일로 언론에 언급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