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

아는사람 2009. 8. 24. 20:52


용서받지 못한 자
감독 윤종빈 (2005 / 한국)
출연 하정우, 서장원, 윤종빈, 김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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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OCN에서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았다. 군대에 적응한 남자(유태정)와 군대에 적응하지 않으려 했던 남자(이승영)의 대비를 통해 비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였다. 이 영화 속 군대에 적응하지 않으려 했던 남자, 즉, 남자 같지 않고 얌전하고 타인의 상처를 신경 쓰는 이승영이란 인물의 여러 면모는 나의 모습과 상당 부분 겹쳤고, 또 그가 겪은 일이 군대에서 내가 겪은 일과 여러 면에서 유사하게 여겨져서, 영화가 좋고 싫고를 떠나 개인적으로 각별하게 다가왔다. 

군 복무를 마치기는 했지만 군대란 조직의 폐해를 나는 직접적으로 낱낱이 경험해보지는 못했다. 자그마한 예비군 중대에서 상근예비역으로 군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 탓에 부대에서 수시로 하는 훈련에 참여해보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부대에서 먹고 자는 현역병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선후임병 사이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경험해볼 수 없었다. 내가 근무하던 곳에는 2명 혹은 3명의 병사만이 있었고, 그 위에 바로 예비군 중대장이 있었다. 도저히 복잡한 관계가 형성될 수 없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군 생활을 했음에도 여전히 선후임 관계의 껄끄러운 부분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인원이 적어도 선임 한두 명, 후임 한두 명쯤은 직접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 나는 선임이 후임에게 잘 대해준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계급이 서로 다른 병사가 상대방을 인간적으로 대한다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아도 굉장히 모순적인 일임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군대에서 계급만큼 절대적인 척도는 없을 것이다. 계급이 높은 자가 계급이 낮은 자에게 명령을 내렸을 때, 그 명령이 지나치게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인 이상 하급자는 철저히 그 명령을 이행해야(혹은 이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규칙이 지배하는 조직 내에서 인간적인 존중을 서로 키워나간다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서 그 규칙을 이행해나가는 사이일 때 가장 수월한 일일 것이고, 그 규칙에 따라 명령하고 복종하는 사이에서 가장 힘겨운 일일 것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이승영은 신병 시절부터 선임병의 명령이 불합리하게 여겨질 때는 거기에 그대로 복종하는 대신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이 선임병이 된다면 후임병을 잘 대해줄 것이라는 다짐을 한다. 이 다짐은 그러나 그의 후임병으로 들어오는 어수룩한 인물 탓에 흔들리기 시작하는데, 이 어수룩한 면모를 둘러싼 담론은 꽤 흥미로웠다. 이승영의 선임병이 '네가 그렇게 잘 대해주니까 너를 만만하게 보고 부러 어리버리한 척하는 것'이라 했을 때 이승영은 '그렇게 연기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라며 일단 자신의 후임병을 옹호하지만(잘 대해주지만), 흩뿌려진 의심의 씨앗은 악착같이 뿌리를 내려 이승영의 마음을 뒤틀어놓고야 만다.

나 역시 상근예비역으로 근무할 당시 나의 후임병에게 나름대로 잘 대해주려고 노력했다. 누군가를 괴롭힐 만한 담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럴 이유도 없었으며 무엇보다도 아무리 군대라는 조직에 속해 있더라도 타인에게 함부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타인을 위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타인이 나를 향해 지니게 될 마음에 더욱 관심이 많아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잘 대해주려는 마음은 영화 속 이승영이 겪은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게 되었는데, 내가 너무 만만하고 나약하게 보여서 나의 후임병이 말을 잘 듣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이 불현듯,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금씩 들기 시작했고, 어느 날 그가 아무 연락 없이 출근을 조금 늦게 했을 때 나는 꽤 따끔하게, 마치 마음속에 무엇인가가 맺혀 있던 사람처럼 그에게 주의를 주고야 말았다. 

특별히 소속된 부대가 없이 집에서 출퇴근하는 상근예비역의 특성상 그러한 무단 지각이나 결근 사태는 탈영으로 간주되므로 상급병사로서는 주의를 주어야 마땅했겠지만, 그의 사정을 헤아리려 들지 않고 다소 감정적으로 주의를 주었던 것 같아 다소 신경이 쓰였다. 무엇보다도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그의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즉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그로서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수단이 휴대전화 알람 기능밖에 없었음을 알고 나서 더더욱 나의 행동에 자책감이 들었다.

나의 후임은 [용서받지 못한 자]의 후임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사건 이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다소 위축되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나대로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못했기에 늘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가 나처럼 아주 사소한 뉘앙스의 말에 상처받는 성격이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선뜻 사과하기가 곤란하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나는 제대한 이후 처음으로 내가 근무했던 예비군중대에 찾아갔다. 올해 예비군 훈련에서 보았던 예비군 중대장님께 따로 한 번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간 것이었지만, 나의 후임병이었던 아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해보고픈 마음도 있었다. 그 후임병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나는 늘 그렇듯 실없이 미소를 지으며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역시 전과 별다를 바 없이 잘 웃었고 또 편안하게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졌다. 내가 워낙 사교성이 없는 탓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설명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나중에 중대장님과 단둘이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눌 때, 많이 아프던 그의 모친이 지난 5월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조기 제대를 할 수도 있겠지만 신청 및 처리 기간을 다 고려하면 일반 제대하는 것과 시기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아 정상적으로 복무하며 주말에 중대장님이 알선해준 일자리를 통해 따로 돈을 벌어 생활한다고 했다. 단순하게 비교할 성격의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 조건에서 지내는 것이냐며 중대장님이 말을 이어가셨을 때는 사실 별 감상이 들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난 다음, 그 아이와 어색하게 악수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 눈이 감겼고, 얼굴이 찌푸려졌다. 

[용서받지 못한 자]를 보고 나서 내가 나 자신과 여러 면에서 닮은 인물인 이승영보다 군대에 잘 적응한 인물인 유태정에게 더욱 매료된 것은 그 역을 맡은 배우 하정우의 매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도 내가 그와 같은 인물이 아니어서, 그리고 그처럼 이 사회의 폭력적인 생리에 별 거부감 없이 적응하여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인물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한 구석에 깃들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한 사람이 편안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겠지만, 그리고 나 같은 유형의 인간에게도 스스로 부정하지 않고 나아갈 길이 있겠지만, 어떻게 생각하건 이 울적한 마음은 떨쳐내기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