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롯 갱스부르와 조니 뎁이 나오고, 라디오헤드의 노래가 온전히 다 나오는 매우 희귀한 장면. [Ils Se Marierent Et Eurent Beaucoup D'Enfants]라는 영화 속 한 장면이라는데, 영화 자체는 매우 낯 간지러운 감성으로 가득할 것 같지만, 이 클립은 어딘지 기적적인 구석이 있다.
뮤직비디오. 이 노래를 이들이 얼마나 싫어했던가.
어쿠스틱 버전.
합창 버전. [소셜 네트워크]의 예고편에 나온 그 버전은 아니다. 그것보다 이게 전반적으로 낫다고 생각한다.
감정 격한(필 충만한/fuck이 리얼한) 크립.
데미언 라이스의 커버.
이제는 라디오헤드를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듣지 않고 있지만, 한때 이들은 나의 우상이었고, 거의 완전한 친구였다. 이제 겨우 20대 중반에 들어선 내가 인생의 가장 힘겨운 시기를 논하는 게 조금 우습기는 하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그런 시기는 10대 중반 무렵이었고, 라디오헤드는 그 시기 내내 나와 함께 했다. 나는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버텼고, 그들의 음악으로 나의 내향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성향이 구축되는 것을 목격했다.
글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라디오헤드의 곡은 Creep이 아니다. 아니, 그들은 곡 단위로 취급할 수가 없는 밴드이다. 그들을 거론하려면 최소한 하나의 음반 전체를 거론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고, 그들의 음악적 성과에 견주어볼 때에도 그편이 더 온당한 접근방식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이 곡을 따로 올린 이유는, 이 곡의 라디오헤드적이면서도 철저히 라디오헤드적이지 않은 감수성, 상징성 같은 것에 있다. 그러한 것은 시대적인 감수성일 수도 있고, 특정한 성격의 인간에게 반복해서 일어나는 어떠한 경험으로서의 감수성일 수도 있다. 21세기 초반을 20대로 살아가는 내 인생에서는 이것이 끔찍할 정도로 반복되었고, 반복되고 있고, 아마 당분간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한때 그러한 감수성을 온전히 극복해냈다고 믿었지만(그래서 Creep 같은 것 따위 전혀 떠올리지도 않고 잘 지냈던 시기도 꽤 오래 이어졌지만), 결국 지금 와서 보니 나는 그저 그 주변을 서성였을 따름인 것 같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고백, 자신을 쓰레기만도 못하다고 여기는 자학... 나는 이런 자의식을 지닌 이들을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한다. 그 자의식은 분명히 더 발전될 수 있거나, 아니라면 그 상태로 정체되어서만은 안 되는 무엇으로 여겨지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틀에 머무는 이들을 미워할 수가 없다. 나에 대해서도 그렇다. 나는 정말 삶을 끝내버리고 싶은 충동을 쉴 새 없이 느끼지만, 그래도 그러한 충동을 느끼는 나 자신을 끝내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못하겠다. 그게 내 한계이자 가능성인 것 같고, 모든 자학적 인간의 근본적인 모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