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는 안 뽑았으니, 올해에는 뽑겠다.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으나 그때에는 연말에 공개적인 결산을 하지 않았으니, 올 연말에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내 양심상 그렇다는 것이고, 누구에게라도 그런 자격 같은 것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겠지.
순위는 무작위나 가나다순이 아닌, 정말 순위에 따른 순위다. 올 한 해 국내 개봉작을 기준으로 선정했다.
1. 옥희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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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이 필요할까. 나는 홍상수 감독이 천착하는 소재, 이를테면 남성의 성적 욕망이나 그 때문에 뒤틀리는 심리의 치졸함 같은 것에 동감은 해도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의 모든 영화를 다 찾아보았음에도, 선뜻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실제로도 그의 영화 전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며, 나쁘다고 평할 수 있는 영화도 많다고 생각한다(가령 나는 그의 초기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 같은 경우, '한국영화사'의 맥락에서 살펴보지 않는 한 좋은 평가를 내리기가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나는 그의 몇몇 영화는 정말 좋아한다. 정말 좋아할뿐더러, 훌륭한 영화라고도 생각한다. 훌륭한 영화이기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데 생각해보니 훌륭하기까지 한 것이다. [밤과 낮],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 수정]이 그렇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 [옥희의 영화]는 그중에서도 훌륭하다. 그는 이제 정말 정점에 오른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는 체계라는 것이 없는 것 같으므로, 정점이라는 단어가 적합한지는 모르겠다. 정점 같은 순간에 다다른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홍상수는 자신의 소재에 더는 갇혀 있지 않은 채, 그럼에도 여전히 그 소재를 포기하지 않은 채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다음 행보가 무척 기대된다. 들리는 바로는 문성근에게 캐스팅 요청을 했고, 그와 별개로 지금 촬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2. 엉클 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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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분미에 대해서는 길게 늘어놓았으니(http://idiosynkrasie.tistory.com/168), 굳이 더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피차퐁 위라세타쿤이 지향하는 바 같은 것에 열광할 수는 없지만, 이 작품만큼은 단연 주목할 만한, 놓쳐서는 안 될 성과라고 말하고 싶다.
3. 바흐 이전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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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영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영화일 것이다. 이야기는 없지만, 맥락은 있다. 변주되지만, 반복되지는 않는다. 바흐에 관한 훌륭한 음악적 고찰을 영화적인 기록에 담아냈다.
4. 인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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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짐머의 사운드트랙이 주는 묵직함에 걸맞은 재미를 선사한 올해의 화제작. 이 영화의 아이디어가 출발하는 지점이나 끝나는 지점은 그리 새로울 것도 없고, 놀라울 것도 없고, 깊이도 없다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잊지 못할 쾌감을 선사한다. 그런 것이 바로 영화의 힘이리라.
5. 하얀 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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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하네케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다. 그의 영화를 즐겁게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지만, 그의 영화를 낮추어본 적 역시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나는 계속 그를 지지할 생각이다.
6. 악마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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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위논란은 무의미했던 것 같다. 모방범죄 같은 것은 일리가 없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잘 따져보면 그저 웃긴 얘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정말 재밌다. 그리고 그 재미는 탄탄한 시나리오와 군더더기 없는 연출에서 비롯한다. 잘 만들었기에 재밌는 셈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 잘 만든 부분에 대해 얘기하면 되고, 잘 만들었음에도 '울리지 못했다'면 그 이유에 대해 분석하여 비판하면 된다. 소재 자체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무의미하고 바보 같은 일이다(도대체 결점 없는 소재가 어디에 있나?). 아무튼 나는 이 영화를 무척 좋게 보았고, 깊이 역시 얼마든지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내가 떠올렸던 별점은 네 개 반 ★★★★☆ (9/10)이었던 것 같은데, 그 생각은 여전하다. 하지만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잔인해서가 아니라, 한 번 보고 나면 조금 맥이 빠지는 영화이기 때문.
7. 유령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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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도 훌륭했고, 연출도 그러했으며, 시나리오도 좋았고, 촬영도 훌륭했다. 모든 것이 좋게 다가왔던데다가, 고전 헐리우드와 히치콕 영화의 향수마저 불러일으켰다. 이런 영화는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8. 리미츠 오브 컨트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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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쉬 역시 점점 차가워지고 있는데, 더 관념적으로, 더 고독해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나는 이게 이 감독의 최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의 본질을 대표하는 영화로 회자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연배우 이삭 드 번콜의 무미건조한 얼굴은 그 자체로 잊지 못할 영화적 경험이다.
9.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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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윤정희가 보여준 연기는 그렇게 뛰어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다만 감독이 그 모든 것을 잘 살려냈을 따름이라고 보는 편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정말 놀랍도록 아름다운 장면이 몇 있었고, 통속적임에도 쉽게 지울 수 없는 여운 같은 것이 결말에는 있었다. 곱씹을수록 더욱 깊어지는 영화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가 '시'라는 제목을 온전히 채웠는지는 더 고민해보아야 할 부분인 것 같다. 현재 나로서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영화 자체가 훌륭하고 진중함에도, '시'라는 제목의 훌륭함과 진중함은 그것을 훨씬 웃돌기에, 결국 그 제목과 맞물린 이 영화는 일종 장르영화처럼 여겨지는 측면이 있다.
10. 공기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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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아닌, 홍콩에 올해 초 갔을 때 보았던 영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이었는데, 매우 인상 깊었고, 꽤 좋았다. 이 영화의 한계는 명확한데, 조금 지나치게 설명적이고, 또 그만큼 친절하게 각각의 인물을 다룸에도, 그 모든 인물이 그저 나열되고 있다는 인상이 든다는 점이다. 이 한계는 동시에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대목이기도 한데, 도쿄라는 대도시에서 사는 인물 군상을 천천히 나열하며 건네는 따스한 위안의 힘이 만만치 않기에 그렇다. 연기는 모두 훌륭했다고 생각하고, 연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대본의 몇 가지 부분이 수정되어야 했다고 본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나는 이 영화가 좋았다. 배두나의 연기에 대해서는...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배두나라는 배우에게 매우 잘 어울리는 배역임은 분명했다고 생각하고, 어울리는 만큼 해냈다고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