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에는 영화를 많이 못 봤다. 그래서 최고의 영화를 꼽는 것도 큰 의미는 없을 것 같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한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올해 국내개봉작 중 가장 좋았던 10편을 순위대로 나열해보겠다.
1. 아메리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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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클루니의 화려한 액션이 담긴 스릴러물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밖에 없겠지만, 배우 조지 클루니와 시네아스트 안톤 코르빈의 조합이 담긴 영화를 감상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이 영화의 리듬을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메리칸'이란 제목의 하이쿠 한 편을 영화로 감상하는 것 같았다. 아름다웠고, 황홀했고, 슬펐다. 올해 첫날 이 영화를 보면서 '이번 해에는 어떠한 영화를 보건 이 이상을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감상이 들었는데, 결국에는 정말 그렇게 되었다. 다른 의미에서 더 흥미롭고 다채로운 영화도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나는 이 영화가 가장 좋았고, 또 그만큼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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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엑스맨도 무척 좋게 보기는 했지만, 이번 메튜 본 감독의 엑스맨은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특히 마이클 패스벤더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앙상블은 실로 훌륭했다.
3. 127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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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메시지는 사실 너무나도 빤하고 지겹고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볼 때에 그런 식의 메시지에 치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엉뚱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의 방점은 주제나 메시지가 아니라, 영상과 음악의 조합, '127시간'이 어떻게 1시간 반 남짓한 시간으로 압축되었는지 지켜보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 영화는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탁월하고 매혹적이다. 대니 보일 감독의 감각이 그야말로 폭발하듯 발휘되었고, 또 동시에 그러한 감각이 이 영화가 다루고자 했던 실화를 가리지도 않았다. 그의 전작 [슬럼독 밀리어네어]보다 이 영화가 100배쯤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4. 블랙 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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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영화, 그야말로 미친 영화였다. 나탈리 포트만과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그들에게 집중되었던 관심에 온전히 부합하는 결과물을 선보였다.
5. 코파카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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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시간]이 영화에서 서사 외의 다른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게 한 영화였다면, [코파카바나]는 반대로 각본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실감하게 한 영화였다. 좋은 캐릭터, 좋은 플롯이 합쳐졌을 때,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은 그저 가만히 놔두기만 해도 훌륭하게 여겨지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정말 사랑스러웠고, 시종일관 가볍게 흘러가면서도 깊은 감정의 울림을 남겼다.
6. 사랑을 카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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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보았던 영화 중 가장 어리둥절하면서도 또 가장 우아하게 다가왔던 작품. 줄리엣 비노쉬도 그렇지만, 윌리엄 쉬멜도 한없이 매력적인 중년의 배우인데, 그 두 명이 함께 연출하는 관계의 양상은 도무지 그 진위를 알 수가 없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런 사실에 관계없이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황홀하고 신비롭게 다가왔다. 배경이 된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따스하고 온화한 풍광이 그 모든 요소를 더 빛나게 했다.
7.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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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 시리즈를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책도 영화도 꾸준히 챙겨보지 않았던 데다가 바로 전편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1]도 안 본 상황에서 이 영화를 보고 '최고의 영화'로 꼽았다는 게 약간 우습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정말 해리 포터에 무심했던 나 같은 관객마저 압도하는 힘이 이 영화에는 있었다. 뭉클한 대단원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했지만, 그냥 이 영화 자체만 놓고 보아도 그랬다. 아이로 시작해서 청년으로 거듭난 인물들이 벌이는 마지막 사투라는 점에서 특히 그랬고, 영국의 훌륭한 기성배우들과 신인배우들을 이 한 편의 영화에서 종합선물세트처럼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8. 드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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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온 영화 중 가장 '클리셰 덩어리'이면서도 동시에 '돌연변이' 같은 작품으로 평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고전 느와르 영화의 규칙, 데이빗 린치처럼 폭력과 공포를 다루는 현대 영화감독의 스타일 등이 그대로 감지되지만, 동시에 그러한 것만으로는 규정할 수 없는 신선한 힘 같은 것 역시 느껴지는 영화다. 무엇보다도 남녀 주연배우인 라이언 고슬링과 캐리 멀리건의 매력은 이 영화를 쉽사리 지나칠 수 없게끔 한다. 하지만 그리 좋은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종반부에 가면 지나치게 늘어지는 감이 있고, 80년대 전자음악을 표방했다는 사운드트랙도 훌륭하다기보다는 작위적인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지만, 역시 얼마든지 언급하고 볼만한 가치는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감독의 차기작이 궁금하다.
9. 환상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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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의 영화는 보통 적당히 웃기고 신경질적인 대부분의 평작과, 웃기거나 진지한 어조로 깊이 울리는 소수의 걸작으로 나뉜다고 생각해왔는데, 이 영화는 굳이 구분하자면 신경질적인 전자에 속하지만, 끝에 가서는 '깊이 울리는' 후자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다가선다. 냉소/염세주의자가 자기 자신을 깊이 통찰하는 대신 그저 끝없이 표면에서만 드러낼 때 다다를 수 있는 하나의 경지 같았다. 좋았지만, 우디 앨런처럼 대단한 경력을 쌓고 그만한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이렇게 어둡게 세상을 볼 수 있구나 싶어서 씁쓸하기도 했다.
10. 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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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그 영화. 두 번 봤다. 두 번 보니 단점이 명확하게 다가왔다. 그럼에도 좋더라. 나홍진 감독이 차기작을 내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흔치 않은 재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