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기타 등등

크리스마스 기록

아는사람 2010. 12. 25. 19:51


크리스마스에는 역시 조용하고 따스한 노래를 들어야 한다.









제임스 조이스와 말라르메의 책을 빌려 왔다. 차갑고, 날카롭고, 미세한 글을 읽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오전에 조이스의 단편 몇 개와 말라르메의 『시집』에 황현산 평론가가 붙인 편지글 형식의 해설을 읽었다. 조이스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서정적이고 외로운 주체를 다루어낸 작가라는 감상이 들었다. 하지만 『더블린 사람들』은 그의 초기작이다. 문학사적으로는 이것을 바탕으로 그가 내디딘 발걸음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탕이었다는 사실은 꽤 각별하게 여겨진다. 조이스는 그 자신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문학이되, 그 자신이 사는 시대의 문학은 그것을 말하는 방식 그 자체라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피네간의 경야』의 원문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라르메의 시집에 관한 황현산의 평문은 명료했고, 세심했으며, 바로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다가왔다. 발레리였던가, 말라르메였던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민음사 세계시인선을 읽다가 거기에 있는 수없이 많은 주석을 보며 그런 작가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났는데, 이제는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외면당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으로 예술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순진한 일이고,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수는 있어도 절대적인 척도는 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다수의 취향은 예나 지금이나 다소 거칠기 마련이라면, '사랑받는다'는 행위가 예술작품을 판가름하는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하기야, 절대적인 척도라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나. 척도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된 것도 이미 옛 얘기 아닌가. 

방학 때 내가 몇 권의 책을 어떠한 방식으로 읽어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그 어떠한 책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할 것 같아 조금 두렵고 불안하다. 학기 중에는 도저히 책을 읽을 시간과 여유가 나질 않는데, 나에게는 그만큼 학점을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학점을 등한시할 바에야,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다. 기왕 속할 것이라면, 할 수 있는 한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학점은 물론 그 모든 것을 정확히 대변해주지는 않지만, 근사치로 확인해주기는 한다. 그러므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이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으니, 결국 방학이 아니라면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서는 것이고, 그런 판단이 서니 마음이 답답하고, 그만큼 이 시기가 더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쓰는 것은 어떠한가? 쓰는 것은 일종의 호흡과도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긴 호흡과 짧은 호흡을 글의 분량과 연결짓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그런 맥락이 아니더라도 확실히 글쓰기는 숨쉬기와 유사하다. 이것은 거의 언제나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고, 꼭 그래서가 아니라더도 다수는 숨을 쉬듯 이미 하고 있다. 그 형태는 중요치가 않다. 하지만 바로 그 형태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 중요함이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쓰고 싶지 않아도 쓰게 될 것이다. 문제는 쓰게 되는 것과 쓰는 것을 어느 정도 구분하는 일일 것이고, 차라리 쓰지 않으려고 시도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일일 것이다. 

이번 방학 때에는 중요한 책을 읽고 중요한 형태의 글을 쓸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결과물로 이어지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러리란 생각을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나는 이 시기를 나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기회로, 나의 숨쉬기로 받아들일 생각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그 무엇도 아니라는 판단도 계속 견지할 것으로 믿는다. 그 판단은 자각인가, 편견인가. 모르겠다. 편견이라면 정당한 편견인가. 그것도 모르겠다. 자각이라면 곧 바뀔 수도 있는 것인가. 그 역시 모르겠다. 

방학을 하고 처음으로 읽은 책은 이준규의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문」을 제쳐놓고 나머지를 읽었다. 방학하고 내가 처음으로 끝마친 '미완의 독서'인 셈이다. 확실히 나는 이 시인이 좋다. 그의 시집이 좋다기보다도 그가 견지하는 바탕(혹은 그가 끊임없이 지워버리는 바탕) 같은 것이 마음에 든다. 시 역시 몇 편은 거의 달콤하게 여겨질 정도로 좋았는데, 특히 표제작이 그러했다. 「문」은 정독을 하기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선 빠르게 훑어내려 가고, 생각이 날 때마다 적당한 부분에서 시작하여 적당한 부분에서 끝내는 식으로, 혹은 거꾸로 읽어내려가는 식으로, 혹은 밑줄을 쳐가며, 혹은 이것저것을 생략하며 읽어야 할 시로 여겨진다. 그렇게 읽는다면 아마 이 시 역시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황해]에 관해서는 트위터에서 길게 떠들었으므로 별도의 기록은 필요 없을 것이다. 영화 역시 볼 수 있는 한 볼 생각이다. 하지만 책과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영화를 내칠 것이고, 내친다면 자연스레 영화를 적게 볼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영화는 타락한 예술, 저급한 예술인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동진 평론가의 말처럼 아슬아슬하게 예술의 영역에 속하는 예술로 여겨지기는 한다. 감각이 메마른 예술가라면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게 많으리란 생각도 든다. 영화는 아무리 관념적으로 말하려고 해도 '실제 대상'을 담아낼 수밖에 없기에 필연적으로 감각을 배제할 수가 없다. 언어예술은 아무리 실제 대상에 근접하려고 해도 그것을 지칭하는 언어를 거쳐 갈 수밖에 없기에 필연적으로 어떠한 추상의 영역에 닿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나? 그럴 것이다. 

[황해]는 꽤 좋았다. 하지만 그만큼 허점도 뚜렷하게 보였다. 나홍진 감독이 스탭을 폭행했다는 소문은 오래되었고, 또 수많은 이들에 의해 확인된 것이므로 헛된 소문은 아닐 것이다. 그에 대한 처벌은 관객이 아닌, 그 자신이 스스로 하게 될 것으로 짐작한다. 멜 깁슨이 최근 몰락하는 것을 보면, 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다.

크리스마스에는 많은 사랑이 필요하다. 연인 간의 사랑도 좋다. 그 무엇도 좋다. 하지만 사랑의 형태를 일방적으로 정해놓고, 거기에 모든 이들을 구겨 넣고, 이런 날에도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대중의 형태는 매우 우울하게 여겨진다. 외로움은 죄나 벌이 아니다. 패배도 승리도 아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될 수는 있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이 마찬가지로 죄악과 벌의 형태로, 승리와 패배의 기록으로 남을 수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