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8일(금)
-몽마르뜨 언덕, 오랑주리 미술관, 셰익스피어 앤 컴패니, 바토 무슈 유람선
파리 아침의 시작은 지하철 무료 신문으로.
까막눈이므로 날씨만 유심히 봅니다.
카날 플러스와 아르테 방송을 프랑스에서는 마음껏 볼 수 있는 모양. 부럽다.
오전 일찍 나와 향한 곳은 몽마르뜨 언덕. 야경도 멋지긴 하지만 워낙 치안이 안 좋은 지역이어서 그냥 아예 아침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근데 정보를 제대로 알고 가지 않아서 물랑 루즈가 있는 곳에는 갈 생각도 못했다는 게 좀 바보 같다. 그러고 보니 은근히 '놓친' 부분이 많네..
언덕 입구 부분에 있던 회전목마. 주변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워서 별 실용성은 없어 보였다.
저곳으로 올라가면 되는 것.
입구 부분에는 엄청나게 많은 흑형 팔찌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팔찌로 양손을 묶으며 '행운을 빌어주었다'는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는 것으로 관광객 사이에서 악명이 높은 이들이다. 근데 돈을 주지 않으면 팔찌 묶어준 것도 풀어주지 않는 데다가 뭔가 험악한 분위기까지 연출해서 더더욱 공포스럽다는 얘기가 있다.
언덕으로 올라가려니 그 흑형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나는 에이미 와인하우스처럼 노노노 하며 지나갔는데, 아예 팔꿈치 옷소매를 잡고 꽤 세게 늘어져서 놀랐다. 파리가 원래 이런 곳이었던가.
팔찌단이 끝이 아니라 서명을 받고 마찬가지로 돈을 요구하는 집시 여인들, 야바위꾼들 등등 몽마르뜨는 파리의 잡스러운 사기꾼들의 소굴 같았다.
그래도 주변 경관은 나쁘지 않았다.
사크레쾨르 사원.
올라가니 별것은 없었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가 테아트르 광장 쪽으로 갔더니, 예전에 이곳에 왔던 기억이 비로소 제대로 살아났다. 이번에 유럽에 방문해서 다시금 둘러본 장소 중에는 기억과 다른 모습인 곳이 많아서 당황하곤 했는데, 테아트르 광장만큼은 기억 그대로였다. 근데 그곳에 있던 화가들 역시 한 절반은 그저 돈 버는 데에만 눈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멍하니 있는 관광객 앞으로 다가서서 무작정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것이 이들의 수법인데, 아예 미리 그림을 그려놓고 후에 빼도 박도 못하게 초상화 비용을 청구하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 놓고 둘러볼 여유가 거의 없더라. 파리는 하여간... 애증의 도시일 수밖에 없는 듯.
몽마르뜨 언덕을 살펴보고는 물랑 루즈는 아예 생각도 못한 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영화 [물랑 루즈]도 여러 차례 보았고, 또 개인적으로 상당히 가 보고 싶던 곳임에도 아예 그 근처에 그곳이 있다는 사실이 상기되지도 않았다. 주변 분위기가 무서운 탓도 있었다만... 지금 생각해보니 더 아쉽네.
오페라역 부근이었던가... 어디에 갔던 것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간 어느 거리를 방황하다가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한 곳 발견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와인과 달팽이 요리를 시켰다.
달팽이 요리는 전에도 한번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거의 맛이 유사했다. 전식으로 나오는 것이어서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프랑스에 온다면 한번쯤은 꼭 먹어볼만한 음식 같다. 질감은 골뱅이와 유사하고, 저 초록색 소스는 색 자체가 풍기는 난해함과는 달리 뜻밖에 굉장히 무난한 향과 맛이 나기에 먹을만하다. 메뉴에 아마 보통 어떤 소스인지 적혀있을 텐데, 내 것은 마늘 소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바게트를 저 소스에 찍어서 먹어보았는데 꽤 잘 어울렸다.
메인 음식으로는 라자냐를 시켰다. 그 이유는 이 식당을 발견하기 전에 이탈리아 식당을 여럿 지나치며 '이태리 식단과 프랑스 식단을 다 먹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라자냐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어서 제대로 평은 못하겠지만, 맛 자체는 괜찮았으나 양이 상당히 많아서 반 정도를 남겼다. 역시 음식은 조금 짠 편이었다. 근데 물을 따로 주문하지 않고 와인만 곁들여 먹다가 나중에 목이 타서 좀 고생했다.
이번 여행 중에 찍은 몇 안 되는 식당 사진. 음식 맛이 너무 훌륭해서였다기보다는 파리에서 혼자 처음으로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 가서 먹은 것이 조금 감격스러워서 찍었던 것 같다.
식사를 잘 마치고, 전날 오르세 미술관에서 함께 끊었던 오랑주리 미술관의 티켓을 쓰러 가기로 했다.
그렇게 고생하고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니 미술작품이고 뭐고 별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짜게 먹은 점심 이후에 수분 섭취도 부족했던 터라 컨디션이 가히 최악이었다.
그래도 일단 미술관까지 왔으니, 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오랑주리 미술관이 유명한 것은 바로 모네의 수련 연작 때문이다. 마네, 모네... 이런 이름을 들으면 하품부터 나오는 사람도 많겠지만(나도 약간 그런 편이다), 이 수련 연작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은 바가 있다면 전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그림은 서양미술사에 있어 말 그대로 '압도적인' 단 하나의 작품으로 꼽혀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상하 폭은 일반 성인 남성만하고 좌우 길이는 그에 한 대 여섯 배는 될 정도로 거대한 그림인데, 수련 '연작'이므로 이러한 그림은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이다. 오랑주리 미술관이 유명한 것은 이 수련 연작을 한 공간에 모아 전시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전시실에 들어가면 수련 연작에 말 그대로 둘러싸이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그리 큰 감흥을 받지는 못했으나, 대단하다고 거듭 생각하기는 했다. 예전에 예술에서의 '모더니즘'을 생각할 때면 곧장 드러나는 실험적인 기법 같은 것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곤 했는데... 여러 인상주의 화파의 그림들도 그렇고, 이 모네의 수련 연작 역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그 '인상'대로 다시금 보여주는 식의 기법을 통해 거의 완전한 모더니즘에 다다랐다는 감상이 들었다.
오랑주리 미술관은 오르세 미술관에 비해 훨씬 자그마한 공간이었지만, 우아하고 귀품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미술관 앞에는 오귀스트 로댕의 '키스'가 있었다.
튈트리 정원은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랬다. 흙모래로 된 땅을 디디며 걷는 공원은 별로 마음에 들지가 않더라. 근데 또 생각해보면, 콘크리트 보도블록은 인공적인 것이니까, 덜 자연적인 공원을 만드는 요소가 되는 셈이고...
오랑주리 미술관을 찾느라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그 유명한 영화잡지 '까이에 뒤 시네마'를 샀다. 읽으려고 산 것은 아니고 기념품으로. :)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에 관한 기사가 커버 기사로 실려 있더라.
숙소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나왔다. 이번에 들른 곳은 바로 그 유명한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패니.' 파리에서 지내던 헤밍웨이를 비롯한 여러 영미권 작가들이 실제로 이곳에 드나들거나 머물며 글을 쓴 것으로 유명한 서점이기도 하고, 에단 호크와 쥴리 델피가 주연한 [비포 선셋] 같은 영화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 것으로도 유명한 서점이다.
파리 사람이 아닌, 파리에 거주하는 영국인(혹은 미국인이었던가...)이 운영하는 서점이고, 또 영어 서적만 취급하는 곳이어서 그런지 분위기가 굉장히 묘했다. 파리 한가운데에서 런던과 보스톤으로 가는 비밀통로를 마주한 듯한 느낌이랄까.
이곳에서도 책을 한 권 샀다. 바로 이 서점에서 직접 발행하는 '매거진.' 가격도 적당했고 텍스트 위주의 두툼한 책 같은 잡지였다. 참고로 이곳에서 책을 사면 이 서점의 도장을 기념으로 찍어준다. 도장을 받으니 개인적으로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내용도 제법 알찬 것 같다.
그리고 이날 밤에 유람선을 탈 생각이었기에, 유람선을 타는 곳으로 갔다. 그렇다, 이때가 밤 8시경이었을 것이다. 유럽의 해는 여름에 정말 늦게 진다.
유람선을 타러 다리를 건너자마자 있던 곳으로 기억한다. 그 다리 위에는 이러한 조형물이 있고, 그 주변으로는 여러 낙서, 꽃, 편지 등등이 있었는데... 이곳이 바로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죽은 그 장소이기 때문이다.
보고 있자니 뭔가 짠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학기에 영국문화의 이해 수업 시간에 들었던 얘기처럼,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사실상 한 일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 그녀가 추모되는 것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조금 과도한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하다.
바토 무슈 유람선을 타는 곳.
8시 30분 정도에 도착해서 9시 배를 탔다. 원래 야경을 제대로 보려면 10시 정도에 탔어야 했지만, 앞서도 밝혔듯 야경에 대한 별 감흥도 없고, 또 여름의 유럽은 해도 늦게 졌지만, 밤이 되면 춥기도 꽤 추웠기에.
초반에는 사진을 몇 장 찍다가 곧 관두었다. 내가 눈으로 직접 보는 그 광경은 도저히 내 아이폰과 내 사진 찍는 실력만으로는 재현해낼 수도, 그대로 간직할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라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파리에서의 하이라이트는 제법 많았던 것 같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바로 이 유람선이었다. 관광객도 많고, 아이들도 더러 있고, 또 나는 혼자 탔던 것이어서 조금 쓸쓸하기도 했지만, 가만히 그 풍경에, 소리에, 빛에, 바람에 집중하고 있자니 황홀한 상태가 되었다. 특히 시각적인 측면에서 압도를 당했다. 타는 내내 '이것은 눈으로 즐기는 오르가즘이로구나...'하는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했다.
그러다 다시금 아이폰을 손에 쥔 것은 바로 이 에펠탑을 마주했을 때였다. 이것 역시 그대로 재현하기도, 영원히 간직하기도 어려운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이것만큼은 카메라에 꼭 담고 싶었다.
에펠탑 부근에 다다랐을 때 시간이 딱 밤 10시였고, 밤 10시와 11시에 에펠탑은 저렇게 몇 분간 반짝반짝 빛난다고 한다.
에펠탑은 가히 장관이었다. 그리고 밤 10시가 되어도 여전히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는 파리의 밤하늘은 또 다른 놀라움이기도 했다.
유람선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다가 찍은 사진. 어떻게 파리의 야경을 싫어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루가 또 끝났다. 오랑주리 미술관에 갔다가 숙소에 돌아갈 무렵에는 몸도 마음도 굉장히 지친 상태였는데, 바토 무슈 유람선을 탈 때에는 그보다 더 황홀할 수 없을 정도로 몸도 마음도 들뜬 상태였다. 파리는 이렇듯 극단적인 체험을 연달아 할 수 있던 곳이다.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그렇듯 극단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