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목)
-브뤼헤 종루, 바실리크 성혈 예배당
브뤼셀 미디역에서 기차를 타고 브뤼헤에 다녀온 날이다. 또한, 온종일 비가 내렸던 날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제대로 비를 맞아본 적이 없었기에, 이날 내내 내렸던 비는 여행의 또 다른 어려움을 일깨워줬다. 비가 오면 무엇보다도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가 없다. :) 뭐 사실 사진 찍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지만, 브뤼헤에서만큼은 사진을 마음껏 찍기 어려운 환경이 잔인하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브뤼헤는 그 평판대로 어딜 가건 아기자기하고 예뻐서 아무렇게나 찍어도 다 근사할법한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날이면 벨기에를 떠날 예정이었기에 날씨 정보를 접하고도 그냥 갔던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조금 아쉽다.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릴 줄 알았더라면 그나마 쌀쌀하기만 하고 비는 거의 내리지 않았던 첫날에 갔을 텐데.
브뤼헤 중앙역. 브뤼셀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에는 1시간 남짓 걸린다.
역 바로 옆에 체인형 마트인 모노프리가 있어서 물과 간식거리를 샀다. 날이 추워서 역에 있던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한 잔 사 마시기도 했다. 비는 계속해서 거세게 내렸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역에서 브뤼헤 중심부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가는 길에는 그야말로 그림같이 아름다운 브뤼헤의 집과 거리가 있으므로 그 짧은 시간마저도 제대로 체감되지 않을 정도이다. 비가 와서 우산을 쓴 채 걸어갔던 것임에도 그렇게 느껴졌으니, 날이 좋을 때 간다면... 하긴 날이 좋다면 그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에 담느라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긴 할 것이다.
아무튼 걷는 내내 사진을 찍을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빗속에서도 풍경은 아름다웠고, 오히려 더 낭만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거리는 한산했고,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정도 헤매다가 이름 모를 성당에도 들어가고, 또 이름 모를 박물관에 들어가서 비를 잠시간 피했다. 피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비바람이 거셌다.
비바람이 불면 지도를 보기가 곤란해진다. 그래서 조금 더 헤맸다. 그러다가 마침내 브뤼헤의 중심으로 일컬을 수 있는 마르크트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을 둘러보고 싶었지만, 일단 어디가 되었건 비를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들어간 곳이 바로 종루이다.
종루 꼭대기로 올라가는 계단은 무척 좁고 가팔랐다. 또한 파리의 개선문과는 달리 올라가는 계단과 내려가는 계단이 따로 있지 않아서, 올라가다가 내려가는 사람을 마주치면 비켜주고, 또 내려가는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게다가 높기도 무척 높았으므로, 올라가는 데에만 30분 가까이 걸렸던 것 같다.
꼭대기에 올라가니 비를 어느 정도 맞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꽤 멋졌다.
틀 아래에는 이런 것들이 적혀 있었다.
비를 피하려 들어갔던 것이긴 했지만,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내려가려니 정신이 살짝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종루 꼭대기였으므로 당연히 정중앙에는 커다란 종이 하나 있었는데... 이 종이 울리기 시작하니 더더욱 정신이 멍해졌다.
종루 입구 부분에서 내려다본 사진.
브뤼헤의 주요 시설물 대부분은 딱히 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이렇듯 '브뤼헤박물관'에 소속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저 앞으로 보이는 것이 종루이다.
비바람은 좀처럼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한곳만 더 둘러보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곳은 바로 바실리크 성혈 예배당 입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명성이 높은 예배당인데... 마침 갔던 시간이 막 문을 닫을 시점이었다. 오전에 잠시 열고, 점심시간에 닫았다가 오후에 또 잠시간 여는 공간이었다. 오후에 다시 오라는 말을 전해 듣고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식사할 곳을 찾아 아케이드 비슷한 공간을 지나가다가 찍었다. 저 너머로 보이는 운하에서 배도 타보고 싶었는데... 그럴 상황이 아니어서 또 아쉬웠다.
우여곡절 끝에 한 식당에 들어가서 그날의 메뉴라는 스파게티를 하나 시켰는데... 보기에는 그냥 평범해 보이지만 맛은 환상적이었다. 정말 한입 한입 녹아 사라지듯 목 뒤로 넘어갔고, 다 먹었을 즈음에는 배도 꽤 불렀다. 가격도 저렴했던 편이어서 더욱 좋았다. 원래 유명한 맛집을 찾아갈 생각도 있었지만 정보도 딱히 없었고 또 날씨 탓에 그냥 예배당이 열 때까지 근처 식당 아무 곳에나 가서 비나 피하자는 심정으로 들어갔던 것인데, 맛이 그렇게 좋으니 벨기에 사람들의 음식 취향에 다시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성혈예배당에 다시 찾아갔다. 겉모습과 마찬가지로 내부도 그리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았고, 다만 여러모로 오래된 것으로 보였다.
예배당을 얼추 둘러본 다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담겨 있다는 자그마한 유리로 덮인 물건을 보고자 줄을 섰다. 예배당의 입장료는 따로 없었지만, 이 물건을 보려면 기부금 형식으로 돈을 내야 했기에 나는 동전 주머니에서 1유로였던가 2유로짜리 동전을 하나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기다렸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그 앞에 서게 되었다. 다들 그 위에 입술을 맞추었지만, 나는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 다만 가만히 손을 올려놓았다.
그 물건은 탁자 위에 놓여 있었고, 그 탁자는 설교대 정도 되어 보이는 조금 높다란 공간 위에 있었다. 천천히 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줄도 제법 길었던 데다가 예배당 관리인 한 명이 탁자 너머로 앉은 채 있었기에, 약간 긴장해서 더 제대로 못 본 측면도 있었다.
어떠한 사연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그곳에 보관되게 된 것인지, 그 피의 진위는 확실한지... 여러 가지 의문점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기보다는 그저 설레고 떨리는 감정만 앞섰다.
성혈이 보관된 예배당 2층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들이 많았지만, 1층에는 조용히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종루와 성혈예배당을 다 둘러보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비가 거세게 내리니 어딜 돌아다닐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다시금 안으로 들어가고자, 애당초 계획에 없었던 그뢰닝 미술관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플랑드르 회화를 그렇지 않아도 제대로 감상해보고 싶기도 했던 터라 어쩌면 잘된 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가 내려도 브뤼헤는 놀라울 정도로 예쁜 곳이었다.
이렇게 곳곳에서 마차가 지나다니기도 했고.
비가 내려도 운하에서 보트를 타는 이들도 있었다.
아이폰에 최대한 빗방울이 안 떨어지게끔 하며 사진을 찍느라 조금 고생했다.
차 한 대가 마차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저 마차를 타고 돌아다녀야 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뢰닝 미술관을 찾아가려 애썼는데... 이번 여행에서 지도를 보고 찾지 못한 유일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심지어 다른 박물관에 들러서 물어보기까지 했는데도. 비가 덜 내렸다면 아마 계속 찾아보았겠지만, 헤맬 만큼 헤맸는데도 나오질 않으니 더는 찾아보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에 담지는 않았지만, 종루와 성혈예배당 말고 브뤼헤 도시 박물관에 가보기도 했다. 이 역시 비를 피하려 들어갔던 것이고, 또 그전에 잠시 들렀던 한 성당의 입장권이 있으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고 해서 둘러본 것인데... 날이 좋다면 굳이 볼 필요는 없는 곳 같았다. 하지만 박물관이라기보다는 놀이기구처럼 직접 버튼을 누르거나 레버를 당기며 돌아볼 수 있는, 약간 새로운 형식의 박물관이어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름대로 실내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만큼 보냈지만, 날씨는 계속 그대로였다. 그런 악천후 속에서 그 정도 둘러보았으면 되었다는 생각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신발 역시 비가 이렇게 내릴 줄 모르고 운동화를 신고 갔던 터라 빗물이 안으로 스며든 상태였다. 오후 3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냥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여간 그 탓에 제대로 찍은 마르크트 광장 사진도 없고... 참 여러모로 슬펐다. 그런데도 벨기에에 있을 때에는 전혀 싫은 마음이 들지 않았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역으로 가는 길에 '콘서트헤보우 브뤼헤'라고 적힌 이 공간을 보았다. 네덜란드의 그 콘서트헤보우와 관련이 있는 곳인가, 그렇다면 클래식 공연이 이곳에서 열리는 것일까... 등등 여러 의문이 많았지만 비바람에 하도 시달렸던 터라 안에 들어갈 힘은 없어서 그냥 겉으로만 보고 지나쳤다.
마침내 역에 도착해서, 브뤼셀로 가는 기차 시간을 확인하고는, 얼마 기다리지 않아 기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그러고 나니 조금 살 것 같더라.
역에는 브뤼셀 곳곳에 있던 레오니다스 초콜릿 매장이 있어서 자그마한 것을 하나 샀다.
근데 맛은 정말정말 별로였다. 레오니다스는 하여간 겉으로 볼 때에도 벨기에에서 가장 상업적인(?) 초콜릿 매장처럼 보이고, 또 별로 맛도 없게 생겼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첫날 그랑 플라스에 있던 한 초콜릿 매장에서 사 먹은 것은 정말 맛이 좋았던 터라 비교가 되어서 더 맛없게 느껴졌던 것일지는 몰라도... 하여간 이것을 사 먹느니 그냥 마트에서 초콜릿바를 하나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브뤼셀까지 오는 내내 비가 내렸다. 벨기에 전역에 이날 비가 온종일 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브뤼셀 미디역에 내려서 보니 이런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으로 찍으니 실제로 보던 것과 색감이 상당 부분 다르긴 하지만... 저 남자는 저스틴 팀버레이크고, 여자는 누군지 모르겠다. 저 지방시 향수는 향이 괜찮으면 하나 사보려고 했지만, 나중에 독일 백화점에 가서 맡아보니 그냥 그랬다. :)
그렇게 일단은 숙소로 돌아왔다. 룸메이트였던 파키스탄 친구는 이날 아침 일찍 프랑크푸르트로 떠났고, 새로운 룸메이트는 아직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모처럼 방 하나를 나 혼자 독차지하게 되니 뭔가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비에 젖은 운동화와 양말을 벗고, 오전에 널어놓았던 빨래가 말랐는지 확인하고 난 다음 잠시간 숙소에서 쉬었다.
브뤼셀에도 브뤼헤만큼이나 비가 내렸던 터라 다시 밖에 나갈 엄두가 잘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밥은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저녁 즈음 다시 시내 중심부로 지하철을 타고 갔다.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작년 여름에 독일에 다녀온 친구가 극찬하며 꼭 먹어보라고 했던 '되너 케밥' 집을 발견하고는, 안으로 들어가서 하나 시켜보았다.
사실 저렇게 펼쳐놓은 사진으로는 저 케밥이 어떠한 모양인지 정확히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삼각형 모양의 두툼한 빵에 고기를 얇게 썰어 넣고, 각종 야채와 소스를 넣어주는... 기본적인 원리는 한국에서 맛볼 수 있는 케밥과 비슷했지만, 실제 맛과 크기는 차원이 다른 음식이었다.
성인 남성의 한 끼 식사도 이 되너 케밥 하나면 해결될 수 있을 정도라고 말하면 그 양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될 것이다. 그 맛은... 먹어보지 않고는 잘 실감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주관적인 견해를 조금 덧붙여 말하자면,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맛볼 수 있는 케밥보다 한 20배 정도 더 맛있다.
유럽에서는, 특히 터키 이민자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독일 등)에서는 정말이지 햄버거를 먹을 필요가 없다. 맥도날드나 버거킹 등에서 파는 햄버거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양은 훨씬 더 풍부하고, 영양가도 더할 나위 없이 더 좋은 케밥이 있기 때문이다. 둘 다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기에 좋은 음식이니까 이렇게 비교하는 것이지, 사실 패스드푸드점에서 파는 햄버거는 이 되너 케밥과 전혀 비교할만한 수준의 음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되너 케밥이 그렇게 고급 음식이란 얘기는 또 아니지만... 확실히 그 가격에 비해 양과 질이 무척 좋은 음식이다.
그리고는 숙소에 다시 돌아왔다. 여전히 새로운 룸메이트는 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날은 끝내 아무도 오지 않았고, 나는 결국 혼자 방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리셉션에서 맥주 한 병을 사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벨기에에서의 마지막 날을 조용히 마무리했다.
근데 호가든 레몬맛은 좀 별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