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수)
-브란덴부르크 문, 호텔 아들론, 운터 덴 린덴, 체크포인트 찰리, 포츠담 광장(스타의 거리), 전승기념탑, 티어가르텐, TV타워, 알렉산더 광장, 로자 룩셈부르크 거리
전날에 미리 샀던 베를린 웰컴카드 3일권을 이날부터 쓰기 시작했다. '각종 할인혜택+무제한 대중교통 이용'의 혜택이 있고 유용하게 잘 쓰긴 했지만, 학생이라면 굳이 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베를린의 웬만한 관광지는 학생 할인이 되기 때문이고, 학생 할인 폭이 베를린 웰컴 카드 할인 폭보다 큰 곳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향한 곳은 브란덴부르크 문. 전날 보기는 했지만, 사진을 제대로 못 찍었고, 또 아무래도 가이드와 함께 다니다 보니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근데 그래 보았자 딱히 신통한 사진을 찍지도 못했고, 더 자세히 둘러보지도 않았다.
이곳은 브란덴부르크 문을 마주하고 있는 베를린 최고의 호텔, 호텔 아들론이다. 영국 여왕을 비롯한 세계 유명인사가 이곳에서 묵고 간 것으로도 유명하고, 세계 여느 최고급 호텔이 그러하듯 상상을 초월하는 숙박비로도 유명한 곳이라 한다. 물론 나는 별다른 동경 없이 겉에서만 구경했다. 그동안 보아온 다른 도시의 고급호텔과는 다르게 외관이 소박한 편이었고, 또 다른 도시라면 몰라도 그 어디건 화려하다기보다는 수수하고 개성적인 베를린을 돌아보는 데에 굳이 이런 고급호텔에 묵는 것이 큰 장점으로 여겨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호텔에 숙박할 기회를 준다면 마다하진 않겠지...
파리 광장을 둘러보고 이동한 곳은 운터 덴 린덴. 베를린 최고의 쇼핑거리, 명품거리로 유명한 곳이다.
베를린에서 가장 깔끔한 거리였다.
가장 인공적으로 보이는 거리이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개차반 같았던 라파예트 백화점이 베를린에도 있었다. 이 라파예트 베를린점은 내부 디자인이 무척 독특했고,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어서 파리 지점보다 훨씬 깔끔했으며, 무엇보다도 지하 식료품 진열대가 듣던 대로 파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 화려하면서도 달콤하고 아름답게까지 여겨질 정도로 좋았다.
디자인/예술 서적 출판사로 유명한 타셴 매장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았고, 이후 찾아간 다른 예술서적 전문 서점에 비하면 어딘지 빈약하게 여겨지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다시 찾아간 곳은 체크포인트 찰리.
전날 체크포인트 찰리를 방문했을 때에는 여유가 없어서 사진을 제대로 찍지 못했기에, 이번에는 확실히 몇 장 찍었다.
어딘지 약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미국 구역을 통과하는 것이라며 겁을 주는 옛 안내 표지판.
제복을 갖춰 입은 이들이 예전 검문소 풍경을 재현하고 있었다.
체크포인트 찰리를 지나서 정처 없이 걷다가 발견한 '트라비 월드.' 트라비는 옛 동독의 대표적인 자동차로, 지금은 베를린 관광 목적으로만 이렇게 따로 사용되고 있다. 워낙 구식이어서 운전하다가 시동도 곧잘 꺼질 정도라고 하지만, 그래도 꽤 인기가 많은 모양이다. 나는 대중교통 무제한 이용 카드도 있었고, 또 굳이 타 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서 그냥 이곳만 이렇게 먼발치에서 보고 지나쳤다.
사진을 찍을 때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저 'Die Welt'는 열기구였다. 포츠담 광장 쪽에서 저것이 떠다니는 모습을 보고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베를린을 상징하는 동물은 곰이다. 그리고 베를린 곳곳에는 이러한 곰 동상이 있다. 쿠담 거리에 특히 많았는데... 그곳에 있는 것은 굳이 사진에 담지 않았다.
전날 보았던 앙드레 케르테즈의 사진전이 열린 공간도 우연히 지나쳤다.
누군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냥 멋져서 찍었다.
전날 먼발치에서 보고 말았던 포츠담 광장의 스타의 거리에 가보았다.
핸드프린팅 같은 것은 없었지만, 이렇게 말 그대로 별 모양으로 독일 영화인들을 기리고 있었다.
막스 오퓔스.
[파니 핑크]의 도리스 되리.
마를렌 디트리히.
프리츠 랑.
베르너 헤어초크.
빌리 와일더.
이날 스타의 거리에는 폭스바겐의 비틀이 여러 대 전시되어 있었다.
스타의 거리를 뒤로 한 채 길을 건너니 베를린 영화제 사무국 같은 곳이 보였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베를린 영화제에 꼭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보니 배가 고파서 포츠담 광장에 있던 케밥집에 들어갔다. 되너 케밥이 아닌, 두룸 케밥이란 것을 시켰더니 위 사진 속의 케밥을 주었다. 한국에서 파는 것과 형태는 유사하나 그 크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전승기념탑.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고 갔던 터라 더욱 인상이 깊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았다.
브뤼헤의 종루만큼이나 가파르고 높은 계단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갔으나... 비가 와서 또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탑의 1/3 지점에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곳이 하나 더 있었다.
이런 벽화도 있었음.
베를린에 있는 동안은 날씨가 대체로 좋지 않았는데, 벨기에나 네덜란드에 있을 때만큼 심하게 비가 내린 적은 또 없었던 것 같다. 베를린은 1년 내내 날씨가 안 좋은 편이지만, 그래도 여름에는 인간이 살만한 날씨가 된다고 한다.
베를린의 전승기념탑은 파리의 개선문처럼 차도로 둘러싸인 곳이었기에 지하통로를 통해서만 갈 수 있었다. 그런데 개선문까지 가는 지하통로와는 대조적으로 전승기념탑까지 향하는 지하통로의 분위기는 꽤 삭막한 편이었다.
전승기념탑 주변으로 조성된 베를린 최대의 공원 겸 녹지 티어가르텐을 거닐기도 했다. '동성애 섹스는 변태적이다'는 내용으로 보이는 낙서도 있었다. 실제로 티어가르텐은 동성애자들의 애정행위가 자주 발견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내가 위 사진 속 낙서를 잘못 기억한 채 친구에게 "베를린 공원에 보니 [동성애자 섹스 금지]란 낙서가 있더라"하고 말했더니, 그 친구는 "그럼 이성애자 섹스는 허용되는 거야?"하고 되물었다. :)
개방적인 문화로 유명한 베를린에도 극단적인 정치색과 이념을 지닌 이들은 분명히 있는 듯 보였다.
전승기념탑 주변에는 구멍가게 하나 없이 그저 극단적인 녹지만 펼쳐져 있기에, 아예 긴 산책을 할 목적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차나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것 같았다. 나도 전승기념탑에 오는 길에는 버스를 타고 이동했지만, 돌아갈 때에는 그냥 그전까지 돌아다니던 다른 유럽 도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별 생각 없이 걷기 시작했는데... 엄청나게 걸었다. 티어가르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공원이었다.
어찌나 크고 울창하던지, 꼭 산속에 온 것만 같았다.
예쁘장하게 꾸며놓은 곳도 더러 있었지만, 아기자기한 맛은 없었다.
엄청난 거리를 걸어 브란덴부르크 문까지 왔다. 여행하면서 하여간 이날 가장 많이 걸었던 것 같다. 이럴 것이라면 도대체 왜 무제한 교통패스 카드를 산 것인가... 하며 자책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저 창 너머로 흐릿하게 보이는, 그리고 전날 S반을 타고 돌아다니며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던 TV타워에 가보기로 했다.
TV타워 안에는 이렇게 세계 각국의 고층 타워가 몇 미터 높이이고, 언제 완공되었는지 등의 정보와 함께 벽면에 그림으로 부착되어 있었다.
이곳에도 베를린 곰 동상이 있었다.
베를린의 TV타워는 표를 끊는다고 해서 바로 입장하여 올라갈 수 있는 게 아니라, 순번을 받아 정해진 시각이 되면 올라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표를 끊고 대략 1시간가량 후에나 들어갈 수 있는 순번을 받았기에, 그냥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TV타워는 옛 서베를린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 중 한 곳인 알렉산더 광장 바로 앞에 있었기에, 둘러볼 것은 많았다.
알렉산더 광장.
알렉산더 광장 U반역 입구.
알렉산더 광장은 이 TV타워 덕분에 초현실적인 미래 도시의 일부분으로 다가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냉전 시대에 집필된 SF 소설에 나올법한 옛 공산권 국가의 미래 도시 같았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대표적인 조형물인 시계탑. 세계 각국의 주요 도시와 함께 시간이 적혀 있어서 새삼스레 서울의 시각을 찾아보고 감상에 젖기도 했다.
그 밖에도 여러 상점과 백화점이 광장 주변에 있어서 시간을 보내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특히 중고책방이 한 곳 있어서 유심히 살펴보았다. 독일계 대형 체인 헌책방 같았는데... 책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가격이 워낙 파격적이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나중에 다시 찾아와서 그중에서 가장 끌렸던 사진집을 한 권 샀다.
입장시각에 맞춰 TV타워로 돌아왔다.
TV타워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액체류 반입이 불가능했다. 입구에는 보안검색대가 따로 있어서 입장객은 소지한 가방을 직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자그마한 물 한 병을 가지고 갔으나 그러한 부분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나는 무슨 대꾸를 할 틈도 없이 직원이 내 가방 속 물병을 집어서 쓰레기통에 던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아야 했다. 가지고 올라갈 수 없는 것이라면 그냥 그 자리에서 다 마실 생각이었는데... 배낭 여행객에게 빈 생수병 하나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데... 더군다나 빈 병을 환수하는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독일에서 텅 빈 물병 하나는 껌 한 통에 필적하는 금전적 가치가 있는 것인데...
빈정이 상한 채 검색대를 통과한 다음에는 기나긴 줄을 서야만 했다. 줄이 겨우 줄고 난 다음에도 속도는 빠르지만 비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야 했기에, 여러모로 우울했다. 그렇게 해서 올라갔는데 별것 없다면 무척 슬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기우였다. TV타워의 전망은 단연 베를린에서 볼 수 있는 최고의 전망이라는 감상이 들 정도로 좋았다.
이렇듯 어디에서건 전망을 볼 수 있게끔 사방이 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맥주부터 칵테일까지 다양한 음료를 파는 바도 한 곳 있었으며, 바로 이 위층에는 비싸고 전망 좋은 식당도 있었다.
유리로 된 창 같았음에도 사진을 찍어도 반사되는 부분이 거의 없었고, 앞서 말했던 대로 전망도 무척 좋은 편이었다.
베를린에서도 해가 늦게 졌기에 이곳에서 근사한 야경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야경을 본다면 정말 근사할 것 같았다.
아무튼 전반적으로 상당히 전망이 좋다는 감상은 들었지만,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일반적으로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고 일컫는 그런 미적 요소를 찾아보기 어려운 건물과 거리로 메워져 있다는 감상도 들었다.
그 근처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독일의 대표적인 전통요리인 그릴 학세를 시켰다. 꽤 저렴한 간이식당이어서 그랬는지 맛은 별로였다. 감자나 양배추절임도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무척 짰다. 그런데 다른 좋은 식당에서도 양배추절임은 대체로 짠 것 같더라. 독일요리는 전반적으로 기름기는 많아도 담백한 맛일 줄 알았는데, 이 요리는 기름기는 많았지만 담백한 맛보다는 신맛이 났다. 그렇지만 맥주는 무척 매우 상당히 맛이 좋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상은의 베를린 여행기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 거리에 가보기로 했다. 마침 근처 U반 역 중에 로자 룩셈부르크 역이 있었기에 이동하기도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거리에 있던 바빌론 극장.
로자 룩셈부르크 거리.
가구 인테리어 숍의 쇼 윈도우.
과연 흥미로운 가게가 여럿 보이기는 했지만, 베를린은 운터 덴 린덴을 제외하고는 어느 거리건 간에 상점과 볼거리로 가득 차 있다는 인상이 드는 곳은 없었다. 심지어 운터 덴 린덴보다 더 유서 깊은 번화가인 쿠담 거리마저 다른 도시의 거리에 비해서는 한산하게 여겨졌다. 도시 면적이 워낙 크고 인구 밀도는 또 그에 비해 상당히 적기에, 무엇이건 듬성듬성 떨어져 있다는 인상이 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특히 현지인들에게 잘 알려진 거리일수록 관광객에게는 일종의 흐릿한 사진처럼 다가온다. 그냥 별 정보 없이 한두 번 거니는 것만으로는 그곳이 왜 현지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거리인지 쉽사리 감을 잡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만큼 겉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상점이나 식당 수가 적은 편이다. 그보다는 안으로 들어가야 비로소 놀라울 정도로 풍부하고 다채로운 모습을 내보이는 공간이 대다수다.
베를린 이전에 들렀던 각국의 수도인 런던, 파리, 브뤼셀, 암스테르담은 그래서 별다른 여행계획을 짜고 가지 않았음에도 대충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그 도시에서 현지인들이 공유하는 문화를 체험할 수 있었다고 자부하지만, 베를린에서는 그와 마찬가지의 태도로 임했기에 철저히 반쪽짜리 관광객으로서의 체험에 만족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베를린에서 보낸 일정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 베를린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았더라면 더 깊이 알아보고 갔을 텐데.
그렇지만 또 생각해보면, 베를린에 처음 와서 모든 것을 단번에 다 파악하고 체험하려는 것은 그저 욕심을 부리는 일인 것 같았다. 사실 관광객으로서 즐길 거리도 제대로 다 즐기지 못한 상황이었다. 나는 우선 그것에 만족하기로 했고, 그 외에 내가 보고 듣는 나머지 것들은 다 행운으로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이날은 숙소에 돌아와 브라질에서 온 룸메이트 두 명과 즐겁게 인사를 하고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로는 리셉션 측에서 친절히 배려해준 덕분인지 계속 한국인 룸메이트와 함께 지냈다. 좋기도 했고, 나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호스텔 환경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은 거듭 했던 것 같다. 다른 이들과 함께 있는 게 싫다기보다는, 그저 그렇듯 함께 하는 일을 아무리 반복해서 겪어도 도저히 능숙해질 기미가 없으니까 힘겨웠고, 여전히 힘겨운 것이리라.
아무튼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베를린은 여전히 미지의 도시였지만, 머물수록 더 오래, 깊이 알고 싶어지는 곳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