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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들의 도시In Bruges>(이하 <In Bruges>)는 벨기에 브뤼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킬러들이 주요인물로 나오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킬러들의 도시'라는 제목을 뽑아내다니 참.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다면, 아니 애당초 흥행에 성공할 수 없는 영화를 흥행물로 포장했다가 큰코다친다면, 저러한 제목으로 <In Bruges>를 무슨 코믹 스펙터클 액션 영화처럼 선전한 데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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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맥도나Martin McDonagh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니 이 영화 말고는 다른 작품을 찾아볼 수 없더군요. 아마 이 작품이 데뷔작인 모양입니다. <In Bruges>는 데뷔작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데뷔작다운 신선함과 미숙함을 느낄 수 있는 영화입니다. 콜린 파렐이 연기하는 배역 레이에 의하면 '시궁창shithole'이고 브렌단 글리슨이 연기하는 켄에 의하면 '중세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인 벨기에의 외딴 도시 브뤼주에, 두 명의 킬러가 보스의 지시를 받고 찾아가서 은신한다는 설정도 그렇거니와, 그곳에서 킬러 두 명이 미술관이나 오래된 교회에 찾아가며 중세의 문화를 감상하는 모습 역시 무척 유쾌하고 인상적이지요. 누군가는 이러한 점을 시크하다고 일컬었더군요.
그렇듯 시크하고 스타일리시한 면모는 좋았지만, 플롯 전개는 그만큼 좋지 않았습니다.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은 영화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여겨질만큼 억지스럽게 다가오는 부분이 몇 군데 있더군요. 철두철미하고 냉혹한 킬러가 단지 어린아이 한 명을 죽였다는 사실로 고통스러워한다는 설정에는 공감도 갔고 흥미도 일었지만, 그가 죽인 아이가 유명인사의 자제나 다른 킬러 집단 보스의 자식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어린아이일 뿐인데, 그 킬러 본인만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그 킬러의 상관조차 바로 그가 그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킬러에게 그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린다는 뉘앙스의 전개를 지켜보고 있자니 기가 막혔습니다. 아무리 인권을 중시하는 유럽국가에서 나온 영화이기는 해도 조금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 그럼 저 킬러들이 소속된 집단이 아동보호협회 같은 것이라도 된단 얘긴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러고 보니 어린아이를 실수로 죽였을 당시 레이가 원래 죽이고자 했던 사람은 바로 고해성사를 들어주던 한 늙은 신부였는데요, 그러한 신부를 비롯한 카톨릭 사제가 어린아이를 성적으로 유린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생겨나는 것을 고려해보면, 정말 그가 속한 단체가 아동보호협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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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들'의 보스, 즉 레이와 켄의 보스 해리가 하필이면 벨기에의 브뤼주로 그들을 보낸 것은 그곳이 은신하기에도 좋고 사람을 죽이기에도 좋은 장소여서가 아니라 보스가 개인적으로 그곳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해리는 유년 시절 벨기에 브뤼주에 다녀온 경험을 인생의 가장 값진 추억으로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부하들을 브뤼주로 보낸 것이고, 그로써 그들에게 값진 선물을 해준 셈입니다. 상대적으로 교양 있는 킬러인 켄은 그 선물을 소중히 받습니다만, 대도시에서 자라난 레이는 브뤼주를 시원치 않게 생각하지요. 켄으로부터 레이의 취향을 전해 들은 보스 해리는 불같이 화를 내고요. 아기자기한 웃음이 터지는 부분이지요. 그때 해리를 달래고자 켄이, 레이가 한 말이라며 지어내는 대사가 있는데요, 그 말은 바로 "깨어 있지만,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은 기분이에요. I know I'm awake but it feels like I'm in a dream,"입니다.
<In Bruges>를 보고 난 개인적인 감상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그 대사에서 'dream'이라는 단어를 강조한 무엇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하고,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는 듯 잔뜩 힘을 준 영화. 이 영화의 홍보를 맡은 이들은, 동유럽풍 도시에서 일어나는 굉장히 흥미진진한 액션 시퀀스를 이 영화의 핵심으로 내세운 것 같습니다만, 사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정적·고요·참회 같은 일련의 단어가 뜻하는 바에 더 가깝습니다. 서로 총을 겨누고 뛰어다니는 장면은 결말부분에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지요.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있다면(혹은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이 있다면) 바로 푸른 새벽에 눈가가 촉촉이 젖은 채 창밖을 내다보는 레이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Winterreise> 연가곡 중 마지막 곡인 [거리의 악사Der Leiermann]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그는, 자신이 살해한 어린아이를 떠올리는 것이지요. 중세 이단자를 심판하는 잔인한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나 [최후의 심판]을 보는 레이의 눈빛도 그러한 맥락에서 무척 인상적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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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감동적이지 않은 데도 묘하게 끌리는 작품을 종종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감동적이라는 표현 자체가 사실 굉장히 주관적인 감정이나 취향과 관련된 것이기에 별 의미 없는 진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나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 천국> 같은 작품처럼,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바가 있고 눈물마저 지을만큼 마음이 동하는 요소가 있는 작품을 '감동적'이라는 표현으로 일컬을 수 있다면, 그와 반대로 가슴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지만 눈과 귀와 코와 모든 감각기관을 움직이는 작품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죠. 개인적으로는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 같은 영화가 바로 그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In Bruges>라는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이 영화 역시 그러한 유형에 속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는 그저 싱겁고 가벼운 농담처럼 보였지만, 좀처럼 이 영화와 관련된 생각을 지울 수 없더군요. 오손 웰즈의 영화를 보고 브뤼주의 중세건물양식을 감상하는 킬러라니, 근사하기는 근사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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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말에 보았던 <레볼루셔너리 로드Revolutionary Road> 역시 <In Bruges>만큼이나 인상적인 영화였기에 이곳에 간단한 메모라도 남기고 싶었지만, 무엇인가를 남긴다면 꼭 링크하고 싶었던 The Ink Spots의 'The Gypsy' 음원을 구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도 <In Bruges>에 나왔던 슈베르트의 가곡 음원은 쉽사리 구할 수가 있었기에 함께 올립니다. '거리의 악사'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가운데 가장 어두운 편에 속하는 <겨울 나그네>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분위기의 곡이죠. 어린아이의 생명을 앗아간 죄로 몸부림치는 아이리시 킬러를 연상하면서 한 번 들어보시길.
http://sportsworldi.segye.com/Articles/EntCulture/Article.asp?aid=20090309004596&subctg1=15&subctg2=00
(영화 삭제관련 장면, 기사)
이 리뷰를 다 작성하고 난 다음에야 <In Bruges>는 제목뿐만 아니라 영화 내용마저 훼손당한 채 국내에 개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필름 일부분이 잘려나간 것이죠. 영등위에서 판결을 내린 것도 아닌 부분을 수입사 측에서 삭제하다니. 그것도 고작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혐오스런 장면을 삭제했다. 우리나라 정서와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같은 수준의 변명밖에 늘어놓지 못할 이유로. 과연 영화감독은 이러한 편집에 흔쾌히 동의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영화 수입 계약서에 '본사는 이 영화를 마음대로 건드릴 권한이 있다' 같은 문구가 들어가 있었던 것일까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에 새삼스레 공감하게 되네요. '킬러들의 도시'라는 제목에만 조금 황당해하고 있던 차에 편집 얘기를 접하고 나니 수입사에 가서 환불을 요구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드는군요. 아무튼 이로써 저 역시 본의 아니게 흥행실패에 조금이나마 일조하게 될 것 같습니다. 참으로 유감입니다만, 이런 식으로 영화를 다루면서 흥행을 바라는 심보는 심판받아야 마땅하겠죠. 정말 유감입니다.
별점 : ★★★☆ (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