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을 맞이해서, 광주 거리에는 이렇듯 5·18 민주항쟁과 관련된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1.
5월 13일, 별 계획 없이 광주로 떠났습니다. 별 계획이 없었던 만큼 무계획적으로 돌아다녔습니다만, 어떻게든 두 곳은 꼭 들러보자는 마음은 먹은 채 돌아다녔죠. 한 곳은 광주고 앞 헌책방 거리였고, 다른 한 곳은 바로 국립 5·18 민주묘지였습니다.
원래는 5월 18일에 국립 5·18 묘지에 다녀오면 좋으리란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날이 날인지라 워낙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미리 다녀왔습니다.
헌책방 간판이 아닌 다른 것을 찍으려 카메라를 사용한 것은 꽤 오랜만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전시물을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라서, 사진다운 사진은 찾아보기 힘들지만요. 어수룩한 부분, 모자란 부분이 있더라도 그냥 너그러이 봐주세요.
클릭하면 크게 보입니다.
2.
국립 5·18 민주묘지로 가는 대중교통수단은 버스가 유일하고, 단 한 노선밖에 없는 그 버스 번호는 518번입니다.
국립묘지 앞의 모습입니다. 여러 조형물을 만들고 계시는 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참배일정에 낯설지 않은 몇몇 정치인의 이름이 있어서 약간 당혹스러웠습니다. 저는 9시쯤 도착해서 두어 시간 정도 머물렀는데요, 박희태 대표는 보이지 않더군요. 5월 18일에는 참배했던 것으로 보아(TV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일정을 적을 때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5·18 민주항쟁 추모탑입니다. 굉장히 높았습니다.
추모탑 옆에 있는 동상.
단체로 온 참배객은 이 요령에 따라 참배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참배할 때는 비장한 추모곡이 흘러나왔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던 것 같았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묘지 사진은 찍지 않았어요. 묘지는 그냥 눈으로만 보고 싶더라고요. 시간이 일렀던 터라, 다른 사람이 별로 없어서 홀로 천천히 둘러볼 수 있었죠. 묘역을 청소하는 분이 보였습니다. 제가 계속 둘러보고 있자 그분이 다가와서 묘지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시고 억양이 꽤 강한 편이셔서 물어보니 광주 토박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분도 개인적으로 광주항쟁 때 얻은 상처가 있지는 않을지 궁금했고 또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냥 들려주시는 얘기만 듣고 왔네요. 햇볕이 무척 뜨거웠습니다.
유영봉안소 내부 모습입니다. 묘지에 묻힌 분들의 사진이 진열된 곳이었어요. 어린 학생(분)들의 사진도 있었습니다.
김대중, 이회창, 고건, 김종필, 정동영, 김영삼(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등 여러 정치인이 참배기념으로 심고 간 나무들입니다. 마지막 사진은 그냥 묘지 곳곳에 조형물처럼 있던 꽃이에요. 그냥 평범한 들꽃처럼 보였는데요, 이것 역시 인공적으로 심어진 것이긴 하지만, 기념 나무보다 묘지에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5·18 추모관에 조성된 당시 건물입니다. 오월상회 같은 가게는 옛날 가게일지라도, 간첩신고와 대공상담은 아직 옛날 얘기가 아니죠.
2008년에는 촛불을 들 수 있었지만, 1980년에는 횃불을 들어야만 했을 거예요.
피묻은 돌도 있었습니다. 정말 당시 피묻은 돌인지는 모르겠네요.
날짜별로 광주항쟁의 역사가 세세히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주먹밥으로 광주시민군을 도왔다는 얘기가 가장 인상 깊더라고요. 5·18 기념재단에서 펴내는 계간지가 지하철역에 비치되어 있어서 구할 수 있었는데요, 그 계간지의 이름도 [주먹밥]이었습니다.
절규하는 여인.
아직도 범죄가 공훈이 되는 일은 공공연히 있는 것 같지만, 다행히도 오늘날에는 5·18 정도의 규모로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또 모르죠...
처음부터 국립묘지였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하기야 한동안 광주시민이 죽어 마땅한 폭도 취급을 당했으니, 그들의 묘역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겁니다.
추모관에서 가장 나중에 둘러볼 수 있는 전시공간에는 수많은 사람의 글이 담긴 포스트잇이 이렇게 붙어 있었습니다.
9초 싱하형도 글을 남겨주셨고,
날짜와 시간만 적어놓으신 분의 인상적인 글도 있었습니다.
비교적 최근에 홍콩에서 방문한 듯한 사람이 남긴 이 글은 각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아무리 민주화운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전쟁의 형태로 번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은 분명히 일리가 있는 주장일 겁니다. 하지만 무장봉기 없이 민주화가 가능했으리라는 가정을 쉽사리 할 수는 없겠죠. 정말 힘든 문제입니다.
뎃츠베리핫^-^
그래요, 군대 같은 조직에서 비리가 저질러졌을 때, 말단에 있는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는 일이죠. 회사 비리의 책임을 보통 회장이나 중역 간부가 지는 게 당연한 이치인 것처럼요.
저 역시 무기력한 젊은이로서, 이 메모를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밖에도 흥미롭고, 인상 깊은 메모가 많이 있었어요. 전두환을 욕하는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았죠. 2008년 이후에 적힌 메모가 많아 보이기도 했고요.
3.
제가 묘지를 떠날 때쯤에는, 정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묘지 안이 가득 찼습니다. 단체로 온 학생이 대부분이었어요. 교복을 입고 온 학생도 있었고, 사복을 입은 학생도 있었죠. 광주 인근 지역 학교에서는 5·18 묘지로 견학(소풍? 수학여행?)을 오는 일이 잦은 것 같더라고요. 그만큼 지역적으로 광주항쟁에 대해 교육하려는 의지가 투철하게 보였습니다.
저는 수도권(경기도,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는데요, 제대로 끝마친 학교가 없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광주항쟁에 관해 학교에서 뭘 배웠던 기억이 저에겐 없습니다. 제 기억이 잘못되었다거나, 제가 학교를 제대로 안 다녀서 교육받지 못한 부분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우려할 만한 일일 거예요.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요.
전반적으로 5·18 묘지가 준 인상은 좋았어요. 추모관에는 제가 미처 사진에 담지 못한 것을 비롯해 볼거리가 무척 많았고요, 묘지 자체만으로도 각별하게 다가왔습니다. 언젠가 광주에 들르신다면 꼭 묘지에도 한 번쯤 들러보시길 권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광주항쟁은 분명히 광주만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5·18 국립묘지를 방문하고 나서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자가용이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법도 그리 불편하지만은 않습니다. 버스 간격이 30~40분 정도 되고 노선이 하나밖에 없어서 부담되는 면도 있기는 하지만, 버스 정류장에 있으면 굳이 손을 안 흔들어도 알아서 경적을 울려서 태워주니, 버스를 놓칠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예요. 실제로 체감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