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영화

여러 가지(충무로영화제)

아는사람 2009. 8. 29. 00:34


앞서 올린 충무로 영화제 관련 글은 거칠고 어쭙잖은 감이 있어서 영 개운치 않지만 그냥 당분간 놔둘 생각이다. 이렇게라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억울해서 못 견딜 것 같다.

올해 최고의 화제작은 뭐니뭐니해도 대부인 것 같다. 극장에서 대부를 1편부터 3편까지 한 번에 볼 기회가 흔치 않을 테니. 하지만 나는 코폴라 감독에 대한 편견이 강해서 부러 예매하려 들지 않았다. [지옥의 묵시록]은 메시지만 좋은 영화, 바그너의 음악을 잘 사용한 영화... 정도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나치게 영화의 서사 부분만 중요시했던 시기에 본 작품이어서 더 나쁜 인상만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를 포함해 알프레드 히치콕, 오손 웰즈 등 몇몇 전설적인 영화 거장의 작품은 좀처럼 좋아하기가 힘든데 왜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장 뤽 고다르도 내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영화작가 중 한 명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이번에 상영하는 그의 영화 [알파빌Alphaville]을 보았고, 역시나 보는 내내 무척 괴로웠다. 영상언어로 들여다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감미로운 대목도 있었다. 가령 호텔 복도에서 3계급 매춘부가 사립탐정 주인공을 에스코트하는 쇼트 같은 것. 그래서 처음에는 짐짓 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음악 사용도 늘 그렇듯 끔찍하고, 서사는 그가 예전에 시인했던 대로 다른 대다수 프랑스 소설가의 글처럼 재미도 설득력도 없었다. 

존 포드 감독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How Green Was My Valley] 역시 그리 기대하지 않았던 예매작이었지만, [알파빌]과 달리 내 인생의 영화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좋게 보았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기는 하지만 그게 그리 훌륭한 지표가 되지 못하다는 생각도 있었고, 존 포드 감독의 대표작은 아무래도 서부영화일 테니 이 영화는 뭔가 모자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서정적인 옛 탄광촌 이야기에서 별다른 게 나올 수 없으리라는 어림짐작을 했던 탓에 근심이 컸다. 진정한 예술이란 그러나 정말 진부하고 통속적으로 보이는 소재를 그 누구보다도 새롭고 절절하게 다루어낸 결과물이 아닐까.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가 들려주는 탄광촌 마을의 평범한 가정 이야기는 몇 번이고 눈가를 욱신거리게 했다. 1941년 작품인데... 이미 그 당시에 영화사에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 있었다는 감상이 들었다. 그만큼 좋았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신성일 주연의 [안개]는 여러모로 실망스러운 작품이었고(독백과 대사를 조금 더 줄이고 영상으로 보여주었더라면 좋았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아메리칸 뷰티]의 시나리오 작가로 유명세를 탄 알렌 볼의 첫 연출작 [재시라의 말 못할 비밀Nothing Is Private]은 그가 다소 거품이 낀 유명세를 치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회의를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현대 미국사회 내에서의 예민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는 좋은데, 그게 너무 과한 성적 에너지로, 통제되지 않은 서사의 구조로 들쑥날쑥 튀어나와 있었다. 함께 영화를 보던 많은 관객이 쉴 새 없이 웃었을 만큼 유머러스한 부분도 많았지만 나는 그저 그 모든 유머가 불쾌하기만 했다. 정말 가볍게 보려고 마음먹는다면 가볍게 넘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밖에도 본 영화가 몇 편 더 있다. [이브의 모든 것All About Eve]은 이브의 정체를 알고 보았던 터라 그리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았고, 영화보다 연극 같아서(대사가 너무 많고 옛 헐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그렇듯 대사가 뻣뻣하게 발음되어서) 별로였다. [까따린 바가Katalin Varga]는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는 등 여러 상을 휩쓸며 데뷔한 폴란드 감독의 작품이었고, 그 명성만큼 좋았다. 유럽영화 특유의 절제된 대사, 열린 결말, 시적 영상 등을 모두 다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세븐 투 원7 To One]은 홍콩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좋았지만... 너무 시끄러웠고, 너무 감상적이었다. 그래도 재밌기는 했다. 그리고 이 영화 상영관에서는 지난 자크 타티 회고전과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보았던 이명세 감독을 다시 마주치고야 말았다.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일 마릴린 먼로가 나오는 [7년 만의 외출7 Year Itch]을 포함한 몇 편의 영화를 더 보는 것으로 이번 영화제 일정은 끝이다. 이제 복학하고 나면 지금처럼 영화를 자주 보지도 못할 것이고, 그럴 욕심도 이제는 없다. 이 정도면 원없이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간접적인 세계 속에 푹 빠져 있었으니 이제 조금 더 직접적인 세계 속에서 노력해야겠지. 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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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의 외출]을 포함하여 총 4편의 영화를 더 보고 왔다. 셔틀버스에는 자원봉사자 3-4명이 타서 정거장마다 안내를 해주었다. 정시입장이나 상영관 음식물 반입 같은 부분은 여전히 통제가 잘 안 되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 개선된 것만 해도 놀라웠다. 초반에 너무 안 좋은 인상을 받았던 터라 다소 감정적으로 영화제를 바라본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미흡한 면은 있지만 그래도 좋은 영화가 많이 있었으니 그것으로 용서를 해주어야겠다. 

이명세 감독을 [세븐 투 원] 상영관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번 영화제 심사위원이기 때문이었음을 데일리를 보고 알아차렸다. 

마릴린 먼로 같은 여자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 대부분을 보냈다. 초식남이란 용어를 들을 때면 정말 기분이 우울해진다. 차라리 식물남이라고 이름을 바꿨으면 좋겠다. 그러면 적어도 '채식주의자 여성분들, 저를 섭취해주세요' 같은 말은 할 수 있지 않나. 아니, 그런 말을 하면 더 안 좋은 건가?

[매거진 갭 로드Magazine Gap Road]는 홍콩판 [멀홀랜드 드라이브] 같았고(그만큼 나는 좋았는데... 관객 반응은 싸늘했다) [7년 만의 외출]은 기대했던 것만큼 유쾌했으며, [험프데이Humpday]는 영화 대부분이 클로즈업과 익스트림클로즈업 쇼트로만 구성되어 있어서 보는 내내 눈이 상당히 아팠다. 그렇듯 극단적인 영상에는 그만한 극단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 영화에는 그러한 것이 없어서 제법 훌륭한 각본에도 불구하고 견디기가 무척 힘겨웠다. [사랑의 묘약Fais-moi Plaisir!]은 베르트랑 블리에식의 막 나가고 비현실적인 프랑스식 코미디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상식적인 코드로 정말 기가 막힐 만큼 큰 웃음을 주는 영화였다. 상황극과 슬랩스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었고, 그 모든 익살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무척 사랑스러웠으며, 마지막에는 눈물마저 돌 정도로 뭉클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그러나 뻔한 감동 코드는 없었다!). 주연배우 겸 감독인 엠마누엘 모우렛의 또 다른 작품인 [셸 위 키스Un Baiser S'Il Vous Plait]는 비교적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로 기억하는데 아직 극장에 걸려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글도 별다른 수정 없이 그냥 당분간 놔둘 생각이다. 복학을 전후로 이 블로그에 변화를 주고 싶은데 아직 어떻게 할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