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기타 등등

은둔생활

아는사람 2009. 8. 3. 22:49
 


복학신청을 하러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한 3년 만에 찾아간 것이었음에도 알록달록한 예술대학 건물은 친숙하게 다가왔다. 학교에 다닐 생각, 즉 그곳에서 다른 이들과 만나 어울리며 지낼 생각을 하니까 그 친숙함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불현듯 누군가가 강의실에서 공포영화 귀신처럼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정말 두려웠다. 사방을 살펴보며 슬금슬금 행정실로 걸어가서, 절차에 따라 간단한 서류를 채워넣고 전역증을 제출했다. 그게 내가 한 일의 전부였지만 정신이 없었다. 버스에 올라타서 집에 가는 동안 나 자신이 무척 자그마하게 여겨졌다. 내가 걸쳤던 티셔츠는 어제 새로 산 것이었음에도 넝마조각처럼 느껴졌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마트에 들렀다. 거기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장난감 판매대에서 3x3 큐브를 하나 샀다. 무기력하게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지내는 처지에 오락거리가 필요할 것 같아서, 그리고 전부터 한 번 가지고 놀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집에 돌아와서 씻고, TV를 켰다. 하나TV에 [초록물고기]가 새로 올라와 있어서 보았다. 훌륭한 누아르 영화라는 감상이 들었고, 문성근 아저씨는 무엇을 연기하건 다 똑같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감상도 들었다. 저녁에는 마찬가지로 하나TV로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를 보았다. 비현실적이고 가벼운 성적 유희에 치가 떨렸고 또 동시에 낄낄거리기도 했다. 이러한 영화를 만든 사람은 자기 멋대로 인생을 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조금 부러웠다. / 이번 주 내내 '나 홀로 집에'다. 부모님이 교회 분들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새로 지은 교회로 봉헌예배를 드리러 떠나셨기 때문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러한 일이 있으면 무척 기쁘고 좋았지만 올해는 그리 기쁘지가 않다. 이 자유가 여전히 부모님에 기댄 채 주어진 것이라는 자각 탓도 있겠지만, 도무지 헤어날 수 없는 무기력 탓도 있는 것 같다. / 며칠 동안 밤에 애꿎은 휴대전화 번호판을 빡빡 눌러대며 '그림팡팡'이라는 게임을 했다. 열대야 탓에 잠이 쉽사리 오질 않아서, 그리고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그랬다. 큐브를 산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어젯밤에는 낮에도 게임을 한 탓에 팔이 저려서 대신 맥주 한 캔 마시고 잤다. 오늘도 맥주를 마시고, 내일도 맥주를 마시고, 그 다음 날에도, 그 다음다음 날에도 계속 해서 맥주를 마시다가 알코올중독자가 되는 일은 없으리라 확신하지만, 그럼에도 조금 두렵다. 이 풍요로운 두려움을 두렵게 인식하는 내가 더욱 두렵다. 이 뚱뚱하기만 한 자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