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영화

[Irreversible]

아는사람 2010. 9. 21. 09:08


돌이킬 수 없는
감독 가스파 노에 (2002 / 프랑스)
출연 모니카 벨루치,뱅상 카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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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떠한 영화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만, 어떠한 영화는 짓이겨놓는다. 단순히 그 소재가 잔혹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 지점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며, 관객으로 하여금 방관할 수 없도록 미학적 방법론을 압도적인 수준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부류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한지 가려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애당초 여기에는 분류만 있을 뿐, 가치의 척도가 개입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 중 어떠한 것이 더 논쟁적인지 묻는다면, 별다른 망설임 없이, 짓이겨놓는 쪽이 움직이는 쪽보다 더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았을 때, [돌이킬 수 없는Irreversible]이 사람의 마음을 짓이겨놓는 영화라는 것은 2002년 칸 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불러일으켰던 논란과 연관 지어 생각하면 명백한 사실이 된다. [돌이킬 수 없는]은 그냥 짓이겨놓는 것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짓이겨놓는다. 

이는 사실 이 영화의 감독을 염두에 두면 그리 놀라울 것이 없는 점이다. 이 영화의 대본과 연출을 맡고, 심지어 촬영 일부분까지 직접 감행한 가스파 노에 감독은 원래 그렇듯 '불편한' 영화를 찍기로 예전부터 악명이 높았다. 그의 데뷔작 [까르네Carne]는 말고기 푸주한인 중년 사내가 벙어리이자 지능이 모자란 자신의 딸이 생리한 것을 보고, 누군가가 그녀를 겁탈한 것으로 오인해 그 혐의를 받을 만한 작자도 아닌 작자에게 찾아가 '복수'를 하고 감옥에 간다는 내용을 담은 영화다. 노에의 첫 장편 영화 [난 혼자다Seul Contre Tous]는 바로 그 푸주한이 감옥에서 나와 또다시 폭력과 오해로 얼룩진 파리의 삶을 영위하는 것을 냉정히, 그러나 폭발적으로 관조하는 영화다. 이 두 영화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앞서, 우선 그것을 파괴의 영역으로 끌고 간다. 마음은 짓이겨지거나 멍이 든다. 그 이후에 그것은 움직일 수도 있지만, 예전의 그 형태를 간직한 채 움직이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것은 피투성이가 된 채, 혹은 너덜너덜해진 채 움직인다.

그러한 감독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두 배우 모니카 벨루치와 뱅상 카셀을 데리고 작업한 영화가 바로 [돌이킬 수 없는]이다. 벨루치와 카셀은 잘 알려졌다시피 실제 부부이다. 연인도 아닌 부부가 함께 출연한 영화라면, 그들의 관계가 사실적으로 드러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심리일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에는 어떻게 보면 이 둘의 관계가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적으로 나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들은 영화 속에서 다른 여느 커플이 그러하듯 열렬히 사랑하지만, 또 그만큼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보편적인 만큼 매우 피상적인 묘사이다. 그들이 그래서 실제로 어떻단 말인가? 그들은 도대체 그들의 어떠한 부분 때문에 서로 만났고, 또 헤어질 수 있음에도 헤어지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러한 답을 영화 속에서 기대하는 것은 어떠한 영화적 윤리에 어긋나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바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스파 노에 감독은 그러한 부분에 대해 진실을 밝혀주고자 하는 의도가 없던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그들의 관계를 최대한 피상적인 수준, 도구적인 수준으로 한정시킨 채 그 표면의 극단을 추구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돌이킬 수 없는]에 나오는 성애 묘사는 적나라하다. 실로 아름답고 육감적인 벨루치와 카셀이 발가벗은 채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카메라는 탁 트인 공간에서 바라본다. 이들의 사랑은 그렇게 탁 트인 공간에서 공개되어서는 안 될 법한 매우 사적인 것으로 비치기에, 그러한 카메라의 당당함은 오히려 숨어서 지켜보는 것보다 더욱 외설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뿐이다. 그들의 사실성은 사적인 은밀함의 표면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는 데 있을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들의 싸움은 어떠한가.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만큼이나 사실적이지만, 이 역시 상투성을 넘어서는, 그들만의 내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역할은 전혀 하지 못한다.

이러한 특성은 단점일까? 장점보다는 단점에 가까운 특성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을 단점으로 일컬으려면 더 엄밀한 근거가 필요하다. 나는, 그 근거를 애써 찾는 대신, 이 모든 피상적인 인물/관계 묘사가 매우 효과적인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 모든 상투성은 우선 명료하다. 그렇기에 영화가 우물쭈물하며 사방을 둘러보도록 하는 대신 앞으로 단호히 뻗어 나아가도록 하는 데에 적절한 윤활유가 되어준다. 관객은 이들의 인간적인 깊이, 이들의 고뇌, 이들의 관계가 상징하는 복합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영화 자체가 그러한 것을 고려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럴 여백을 남기는 대신 영화는 빈틈없이 이야기를, 영상을, 음향을 밀어붙일 따름이다. 

나는 '앞으로 단호히 뻗어 나아가는 데에'라고 썼지만, 이는 '뒤로 단호히 돌아가는 데에'라고 써야 더욱 적합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플롯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Memento]와 이창동의 [박하사탕]처럼 역순의 서사를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돌이킬 수 없는]은,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간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게 여겨지는 영화이다. 장르적 퍼즐의 치밀함을 추구한 [메멘토]나 시대적 비극을 하나의 인간성으로 탐구하고자 한 [박하사탕]과는 달리, [돌이킬 수 없는]은 오로지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을 말 그대로 충격적으로 체험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생겨난 영화로 비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날카로운 이성도, 타오르는 비판 정신도, 감성도, 그 무엇도 없다. 대신 강렬한 욕망만이 있다. 역순으로 표현될수록 더욱 가속도가 붙는 부류의 욕망.

이쯤에서 이야기의 뼈대를 나열해보겠다.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다. 이들은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처럼 행복하다. 그러나 사소한 언쟁이 생긴다. 화난 여자가 홀로 밖으로 나선다. 그 여자가 정체 모를 변태 성욕자에 의해 강간을 당한다. 사건이 다 벌어지고 나서야 여자의 연인인 남자가 그 사실을 접하게 된다. 그는 그녀의 옛 남자친구와 함께 그 변태를 찾으러 나선다. 그들은 그리하여 '복수'하고자 한 사내의 머리를 무참히 짓이겨놓지만(그렇다, '짓이겨놓는다'!), 머리가 짓이겨진 사내는 그 변태가 아니다. 

이 파괴적이고 냉소적인 이야기가 그저 순서대로 진행된다면 거북한 감상주의를 떨쳐내기 어려울 것이다. '인생은 비극이다'란 관념을 옹호하고자 지어낸 그저 그런 이야기로 비난을 받거나 아예 아무런 언급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스파 노에는 [돌이킬 수 없는]에서 이 이야기를 역순으로 들려준다. 그것도 상세한 설명 없이 곧장 관객의 얼굴 앞에 짓이겨지는 한 사내의 얼굴을 들이대고, 폭동의 소음에서 나오는 주파수로 만든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배경으로 들려준다. 이 영화를 논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리게 한 결정적인 대목인 '강간 씬'은 롱테이크로, 고정된 카메라로,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지며, 벨루치가 토해내는 신음과 그녀를 강간하는 자의 신음을 절묘하게 섞어놓는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그러므로 만신창이가 된 사내가 홀로 서 있는 장면이 아니라, 눈부시게 빛나는 벨루치가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원피스를 입은 채 푸른 잔디밭 위에서 책을 읽는 장면이 나온다. [박하사탕]의 마지막에서 설경구가 연기했던 영호가 그러했던 것처럼, 벨루치가 연기하는 알렉스 역시 티끌 한점 묻지 않은, 그야말로 순수한 박하사탕과도 같이 보인다. 하지만 알렉스는 영호와 달리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녀는 다만 거꾸로 그녀를 비추는 카메라 앞에서 그저 무심히 하늘을 올려다볼 따름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이 영화에 작가가 있다면 그는 인간을 연민하거나 인간의 운명의 비극성을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고자 하는, 어찌 보면 매우 강인하지만 동시에 그만큼 차가운 사람이라는 물증을 찾아볼 수 있다.

얼마 전,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가 개봉했을 때, 아무리 영화 속이라도 표현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는 논조와 예술 표현의 자유성을 옹호하는 논조가 대립하여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 기억난다. 그 논쟁은, 여느 논쟁이 대개 그러하듯, 뚜렷한 승패나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논쟁에서 주목해볼 만한 사실은, 어떠한 논조를 펼치는 이들이건 김지운 감독의 영화의 '깊이'에 있어서는 대부분 그 의견을 같이 했다는 것이다.  이는 몇 가지 사실을 확증해준다. 우선 [악마를 보았다] 역시 '짓이겨놓는' 영화였으며, 그러한 영화는 거의 항상 논쟁에 휘말린다는 것. 다음으로는, 짓이겨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짓이겨놓는 이유, 즉 짓이겨놓는 극단적 미학을 추구해야 겨우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이 있는가, 하는 부분이 거의 항상 문제시된다는 점이다.

[돌이킬 수 없는]은 어떠한가. 나는 이 영화에 그 파괴적인 표현에 걸맞은 내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선 모니카 벨루치로 하여금 그렇게 얇은 옷을 걸치게 해서는 안 되었고('그렇게 입었으니 당해도 싸지 않나?'), 아무리 못해도 그녀가 평상시에 어떠한 일을 하며 사는 인물인지 정도는 보여주었어야 했다. 혹은, 적어도, 그녀가 삶에 대해 품은 생각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려주었어야 했다. 꼭 그녀를 그렇게 희생양으로 삼을 것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앞서 언급했듯 인물을 탐구하는 대신 인물을 사용했으며, 서사를 통해 인간에 다다른다기보다는 영화적 도구를 통해 인간의 서사를 폭발시켜버렸다. 이 영화는 고전적인, 인류 보편적인 예술 작품이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혁신, 충격, 폭발에 가깝다.

나는 그러나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이 영화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영화적인 측면에서 살펴보았을 때,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포스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면서까지 이 영화가 이루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게 여겨진다. [돌이킬 수 없는]은 기존의 것을 전복하고, 새로운 길 위에서조차 자신을 가혹하게 내치며 미지의 영역에 닿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찬 영화적 로켓이다. 이 로켓은 멀리서 우아한 불꽃을 뿜으며 날아가는 대신 관객 바로 앞에서 추하고 뜨겁고 압도적인 불과 압력을 내뿜으며 도약한다. 관객은 그 앞에서 죽어나가거나, 만신창이가 된 채 자신이 목격한 바를 돌이켜보는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감각의 (파괴를 통한) 확장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Le temps détruit tout"는 감독의 선언에 의해 격렬한 사유의 파동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가스파 노에 감독은 [돌이킬 수 없는] 이후 무려 7년 만에 차기작 [엔터 더 보이드Enter The Void]를 선보였다. 그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영화감독이 '작가'로 취급받는 것에 대해 자신은 동의하지 않는다고, 그는 감독이란 단지 여러 활동을 조화롭게 하는 역할(orchestrate)을 할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한 발언과는 별개로, [엔터 더 보이드]는 그가 이전에 추구했던 극단적인 세계관, 인간관이 비로소 그 끝에 다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그가 나아간 길은 분명히 어떠한 '끝'이며, 그 끝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엔터 더 보이드]를 보고 난 다음에 바로 이 영화 [돌이킬 수 없는]을 보았기에, 나는 이 영화에 더욱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견지했다. 그것이 곧 그의 작가성을 증명해주지는 않을지라도, 영화 예술에서 스스로 거부하더라도 감독이 지니게 되는 보편적인 작가성에 관한 일종의 단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별점 : ★★★★☆ (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