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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환상적인, 압도적인 체험이었다. [엉클 분미]는 그 어느 35mm 필름보다 기이하고 절대적인 영상으로, 극도로 긴장된 음향으로 말을 잃게 하는, 진정한 영화적 차원이 무엇인지 가늠하게 하는 영화, 진정 영화적이면서 영화를 뛰어넘는 영화로 다가왔다.
태국의 문화와 풍습에 익숙하지 않다면 이 영화에 대해 정교한 비평을 하는 것은 무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러한 부분에 대해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무지하기 때문에 감히 어떠한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진다. 그럼에도 무엇인가 말을 남기고 싶은 욕망을 부정하기 어렵게끔 하는 영화, 그것이 바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신작 [엉클 분미]이다.
우선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이 영화를 관람한 환경이다. 국내에서 이미 이 영화를 접했거나 조만간 접할 이들이라면 대부분 그렇겠지만, 나 역시 현재 [엉클 분미]의 유일한 국내 상영관인 아트하우스 모모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이곳은 스크린과 객석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서, 그곳에 앉아 영화를 보는 것은 스크린 일부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일이다. 어떤 이들은 이에 적응하지 못한 채 불편함을 겪을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이들은 이러한 구조에 동화되어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에만 체험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영화가 다루는 소재. [엉클 분미]에는 귀신, 괴물, '말하는 동물' 같은 것이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등장한다. 판타지 장르에 속하는 영화가 아닌 이상 그러한 존재의 등장에 호들갑을 떠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건만, 이 영화에서는 도저히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서 발을 좀처럼 떼지 않는 구조를 취한다. 이것은 명확한 구분을 전제로 하는 서양 문화에 대비되는 동양 문화의 특징 같기도 하지만, 그러한 설명만으로는 좀처럼 담아내기가 어려운 힘을 감지할 수 있는 방법론이다.
이야기는 생각 외로 간명하다. 암에 걸려 곧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분미 삼촌이 자신의 친척 몇 명을 불러 함께 지내다가 곧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사실상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의 전부. 영화의 플롯 구조 역시 그러한 이야기를 투박하다는 감상이 들 정도로 정직하고 소박하게 들려주는 역할을 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은 기이하고 복잡하게 다가올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그 낯선 소재, 그리고 그 소재를 사용하는 방식 때문이다. 그렇듯 낯선 소재와 실험적인 방식을 택했음에도 이야기는 이 땅 위에 온건히 뿌리내리고 있기에 혼란이 가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메라의 시선과 음향 효과는 어떠한가. 이 영화의 기술적인 완성도는 매우 높은 수준이다. 필름의 색감은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자연스러우며 아름답고, 다른 면모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완성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영화의 실험적 의지와 결합하여 더욱 단단하고 날카로우며 부드럽기까지 한 파장을 자아낸다. 그동안 인류가 남긴 위대한 예술의 계보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이 영화에서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멀리서 분미 아저씨의 오두막을 비출 때 자그마한 점으로 남는 전등 불빛과 괴상한 털북숭이가 되어버린 분미 아저씨 아들의 눈빛이 대비되는 지점 같은 것에는, 감히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려운 직관적 힘이 깃들어 있다. 혹은 말하는 메기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끓어오르듯 기포가 이는 물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것과 동시에 신경질적이면서도 내면으로 침잠하는 듯한 음향이 극장 안을 가득 메우는 것. 그러한 기술은 부정할 수 없는 매혹으로 다가오며, 관객을 어떠한 구원(빛)으로 이끈다는 확신(그렇지 않을 리가 없다는 믿음)을 준다.
이 모든 것이 한 데 어울려 뭉치면, 내가 앞서 토로한 '환상적인, 압도적인' 체험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위라세타쿤에게는 이 영화보다 더 전위적이었던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열대병] 같은 그의 전작보다 [엉클 분미]가 훨씬 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그래도 따라갈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도 무마할 수 없는 실험이 있다. 영화 예술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그 균형 지점을 찾는 것이라 한다면, [엉클 분미]는 아주 절묘하게 균형을 찾아낸 수작이며, 걸작으로 일컬어지기에 한 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그래서 무엇이 어쨌단 말인가? 도대체 이 영화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이 영화가 21세기 영화의 미래라는 거창한 수식은 붙이지 않겠다. 다만, 21세기를 맞이하여 새롭게 등장한 여러 영화 가운데 놓쳐서는 안 될 체험이라는 말은 꼭 남기고 싶다. 3D 영상이 아니더라도 구현할 수 있는 미래가 있고, 다다를 수 있는 인간의 정수가 있다는 상징, 그것이 [엉클 분미]이다.
별점 : ★★★★★ (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