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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 감독의 신작 <번 애프터 리딩Burn After Reading>을 보고 왔습니다.
1. 배우
<번 애프터 리딩>은 출연한 배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한 영화였습니다. 조지 클루니와 브래드 피트가 특히 돋보이는 영화더군요. <오션스 일레븐Ocean's Eleven>에 둘이 나란히 출연했을 때는 정말 이름값도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번 애프터 리딩>에서는 정말 이름값 확실히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멋진 면모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확실히, 그야말로 확실히 망가져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망가진 모습은 무척 사랑스러웠고요.
프란시스 맥도먼드나 존 말코비치의 연기 역시 나쁘지는 않았지만, 다소 과장되었다는 인상이 들더군요. 영화 속 모든 인물이 다 '과장된'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 과장된 인물을 '과장되게' 연기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그 두 배우는 그렇게 한 것 같다고나 할까요.
틸다 스윈튼은 그리 비중 있는 역할을 맡지 않았음에도 계속 눈길이 갔습니다. 도도하고 까칠하고 실리적이기만 한 여성을 실제로 좋아하기란 힘들겠지만, 그녀가 영화 속에서 연기하는 그러한 여성 캐릭터는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지요. 미드 <식스 핏 언더Six Feet Under>에서 불량한 아버지 역을 잘 소화해낸 배우 리처드 젠킨스 역시 피트니스클럽 매니저로 나와 감초 역할을 잘 해주었고요.
2. 영화
따지고 보면 비중 큰 인물이 있나 싶을 정도로, 중심축을 찾아보기 힘든 영화이기는 합니다. 일종의 소품 같은 영화라고나 할까요. 개인적으로는 체호프의 단막극이 연상되더군요. 그만큼 장편영화라고 보기에는 약간 엉성한 측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깊은 감동이나 충격을 기대하지 않고 본다면 그러나 크게 문제 삼을만한 정도는 아닌 것 같더군요.
모든 배우가 조연 같이 등장하는 이 영화의 진정한 주연은 미국 CIA 본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야기의 전체적인 틀을 잡아주는 데에는 CIA가 큰 역할을 합니다. CIA 기밀문서로 오해할 수 있을 법한 문서를 피트니스클럽 직원이 입수하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을 그려낸 영화이니, 그러한 설정은 당연하겠지만요.
몇몇 리뷰를 살펴보니, 이 영화는 미국인이 굳게 믿고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조롱하는 블랙코미디라는 해석이 있더군요. 공감이 갔습니다. '긍정의 힘'을 믿는 영화 속 인물은 긍정할수록 부정당하기 일쑤고, '행복한 가정'은 죄다 위선적인 부부관계로 형성되어 있음이 드러나니까요. 그러한 틀에 있는 등장인물 대부분은 그냥 단순히 조롱당하는 게 아니라 파멸하거나 파멸 직전까지 몰립니다. 굉장히 냉소적인 이야기지요. 코엔 형제의 특기가 사실 그러한 냉소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3. 감독
코엔 형제 감독의 영화를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감상한 몇 편의 영화와 읽어본 몇 편의 글로 미루어볼 때, 그들의 영화에는 보통 '돈'이라는 소재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주된 요소로 등장하는 것 같고, 인간보다 돈을 더 중요시하는 사회를 냉소적으로 보여주는 데 일가견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러한 측면에서 <번 애프터 리딩>은 전형적인 코엔 형제 감독의 영화처럼 여겨졌습니다. 물론 앞서도 말했듯이 소품에 가까운 영화여서, <파고Fargo> 같은 영화에 비하자면 '그래, 어디 간단히 몸 한 번 풀어볼까' 하고 만들어낸 영화 같다는 인상이 들기는 합니다. 그들의 영화를 많이 접해본 이들은, 그렇듯 진지한 작품과 가벼운 작품을 번갈아 선보이는 것을 그들 감독의 특징으로 지적하더군요. <파고>같은 (유머러스하지만) 강렬한 작품 다음에 정말 나사가 풀려버린 듯한 <위대한 레보스키The Big Lebowski> 같은 작품이 나왔듯,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an> 다음에 <번 애프터 리딩>이 나왔다는 얘기죠. 심지어 이 두 작품의 시나리오는 같은 시기에 집필되었다고 하는군요 :)
4. 여담
코엔 형제에게 부족한 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제목을 짓는 센스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파고>, <번 애프터 리딩>만 보아도 그렇듯 보통 코엔 형제의 영화는 그 제목만 듣고는 도저히 그 내용을 짐작할 수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영화를 보기가 꺼려지게 하는 불안함마저 주곤 하지요,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에도 그러한 이질감이 확실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영화의 내용을 확실히 압축해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매력을 콕 집어내지도 못하는 제목이 대부분이라고나 할까요.
<Burn After Reading>이라는 제목만 보고 '(기밀문서를) 읽은 다음에 태워라'는 속뜻을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 표현이 관용구라 할지라도(자주 쓰이는 표현 같지도 않지만), 영화 속에서 실제로 문서를 읽은 다음에 '태우는' 장면은 전혀 나타나질 않는 데다가 문서 형태도 '태워버릴 수 있는' 종이가 아니기에 더더욱 와 닿지가 않더군요. <CIA Incidents>나 <CIA Confidential>(LA Confidential을 연상케 해서 별로일까요?)같은 제목을 붙였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뭐 이것은 어디까지나 여담이지만요.
별점 : ★★★★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