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방문기

016. 광주고 앞 헌책방 거리 : 2009년 5월, 광주

아는사람 2009. 5. 21. 11:45





상호 : 문학서점 외 10여 곳

주소 :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규모 : 다양함. 책방은 비교적 넒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음.



광주는 무엇보다도 1980년 5월 민주항쟁으로 기억될만한 곳이겠지만, 제가 광주에 찾아간 것은 꼭 민주화운동의 성지에 방문하려는 의도에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저 제가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 어디에라도 가고 싶었을 따름이었고, 광주는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곳이었을 뿐입니다. 그 외에도 저의 관심을 끄는 여러 요소가 있는 지역이기도 했고요. 그중에는 헌책방 거리라는 요소도 있었습니다.


헌책방 거리로 부르기에는 사실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광주고 근처에 있는 헌책방의 수는 아무리 못해도 10여 곳 정도는 될 정도로 꽤 많은 편이지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간격을 둔 채 제각기 떨어져 있는 데다가, 저마다 규모나 특색이 달라서 '거리'의 개념으로 묶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편입니다. 하지만 거리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헌책방이 단일한 지역에 오밀조밀하게 분포된 편인 것은 분명하니, 그냥 따로 떨어져 있는 헌책방으로 보기에는 곤란한 구석이 있죠.


헌책방의 수가 10여 곳을 넘나든다는 설명을 들으셨으니, 제가 위에 올려놓은 간판 사진이 그 중 지극히 일부에 해당할 뿐임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마음에 들었던 헌책방의 간판만 찍은 것은 아니고요, 부득이하게 사진을 찍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사진을 찍을만한 구도가 되지 않았거나 아예 방문하지 못했던 곳도 있었기에, 저렇듯 일부만 담아온 것입니다.


제가 메모해둔 사실을 기준으로 짧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교육서점]에는, 교육과 관련된 책이 많았습니다; 교과서, 참고서, 각종 시험준비서적 등등이 많았죠. 다른 분야의 책은, 양은 적어도 질은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주인아저씨도 친절하신 편이었고요.


[백화서점]과 [영천서점]은 가장 작은 축에 속하는 책방이었습니다. 두 곳 다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운영하는 곳이라는 점도 특이한 사항으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책 분야는 다양하지만, 그리 희귀한 책은 없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역시 이곳에도 교과서나 참고서가 꽤 많은 편이었어요.


[순복책서점]은 반면 비교적 젊은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거리에서 가장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헌책방이기도 했고요. 옆에 있는 텅 빈 가게로 책을 옮기시던 것으로 보아, 책방을 확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구경을 제대로 할 수는 없었어요. 책은 분명히 많았습니다. 아동서적이나 참고서 등도 많았지만, 다른 일반 서적도 그에 못지않게 있어서 적당한 균형을 이룬 것처럼 여겨지더군요.


[제일책서점]은 할아버지 한 분이 지키는 곳이었습니다. 다른 곳에 비해 상대적으로 헌책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만, 책 자체는 흥미로운 게 많이 있는 편이었어요.


[문학서점]에는 문학과 관련된 책이 많은 편이었습니다:) 사회과학을 비롯한 인문학 서적도 많았고요. 2대째 운영하는 헌책방이라더군요. 지금 책방을 운영하는 분은 비교적 젊은 남성분인데요, 전라도 사투리 억양이 꽤 강한 데다가 통통하신 편이어서 넉살이 좋아 보이는 분이었습니다. 실제로도 제가 책을 몇 권 집어드니, 그 책과 관련된 다른 책을 소개해주셨고, 제가 어디에서 왔는지 등을 물어보셨고, 이 근처 말고 다른 곳에도 헌책방이 있는지 제가 질문한 것에 대해서도 친절히 답변해주셨습니다(전남대 근처에 한 곳 정도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하더군요).

광주고 앞에 있는 헌책방은 이렇듯 저마다 뚜렷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공유하는 특징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책방이 전체적으로 다 낡았고 헌책방 안에 비치된 책 역시 그야말로 헌책답게 다 낡은 편이라는 점(새책 같은 헌책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 책방 주인 분들 연배가 다 지긋하시다는 점, 책값이 정말 저렴하다는 점 등이 바로 그러한 점이었죠. 책값은 정말 저렴합니다, 1,000원짜리 헌책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단행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웬만해서는 2,000원을 넘어가는 책이 없었으니까요.


광주고 앞에 있는 헌책방에서 공통으로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을 따로 하나 꼽아보자면, 그것은 바로 책방에서 광주와 관련된, 특히 광주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서적을 두루 찾아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광주 지역 대학생이 주축이 되어 5·18과 관련된 역사를 문학으로 형상화하고자 하는 노력이 깃든 문집 같은 것도 있었고, 5·18 민주화운동이나 광주의 역사에 관한 조금 진지한 학술도서 같은 것 역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양이 그렇게까지 많은 편은 아니었습니다만, 그 종류는 분명히 다양했고, 또 책방 곳곳에 고루 퍼져 있었습니다. 광주가 아닌 곳에서는 쉽사리 구하기 힘들 법한 책이 많아 보였어요.


5월이어서 그랬을까요, 그렇듯 헌책방뿐만이 아니라 굳이 찾아보려 하지 않아도 광주 어디에서나 5·18을 연상케 하는 부분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전당 역 근처 옛 도청 자리에는 광주항쟁의 상징과도 같은 옛 도청의 철거를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지하철 역사 안에는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여러 자료가 게시되어 있었습니다. 금남로 거리와 광주역에는 5·18 기념행사를 알리는 현수막과 계획표가 게시되어 있었고요.

 

헌책방을 둘러보고 숙소에 돌아와 TV를 틀었을 때, 광주지역방송에서는 '광주의 이미지 개선이 필요하다'는 논지의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최근 들어 광주는 노조분쟁이 가장 적은 지역 중 한 곳이 되었음에도, 5월 민주항쟁을 비롯한 광주의 역사 탓에 여전히 기업인들에게는 광주가 기업하기 어려운 도시로 낙인찍혀 있기에 이미지 개선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죠.

우리나라 어느 지역, 어느 고장의 안내판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기업하기 좋은'이라는 표현이 그 순간 생각났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표현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표현을 애매모호하게 쓰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좋다는 게 도대체 누구에게 좋다는 것인지, 무엇을 위해 좋다는 것인지 속시원히 알려주지 않고 그냥 좋다고만 말하는 게 문제라는 얘기죠. 광주항쟁이 남긴 이미지로 기업유치에 애를 먹는 현실은 기업을 경영하는 이들의 의식 수준에 따른 문제일 텐데, 지역의 이미지를 개선하자는 얘기는 현실적인 발상으로 여겨지긴 했습니다만, 뭔가 주객전도가 된 주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9년 5월, 광주의 모습은 여전히 비장하게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겁게만 보였던 것은 아닙니다. 헌책방에 다녀온 다음 날 찾아간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수많은 학생이 활기차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더욱 그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5·18 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된 지는 불과 6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5공 청문회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 당시 군 동원에 책임이 있던 자가 확실히 책임을 진 것 같지 않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빛고을(光州)에는 아직 진정으로 빛이 비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계속 기억하고자 노력한다면, 지금껏 그랬듯 더 밝아지겠죠. 그러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