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미 와츠, 로라 엘레나 해링.)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0. 하나TV에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올라와 있어서 다시 보았다.
0-1. 불과 몇 달 전에 EBS에서 이 영화를 방영했던 적이 있다. 그날 나는 밖에 있었고, 정확히 말하자면 린치의 영화 속에 등장할 법한 낯설고 어두운 모텔 방 안에 있었다. 그 방 안 침대에 누워 TV 채널을 돌리다가 EBS에서 [멀홀랜드 드라이브]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불행히도 그때 막 영화가 시작했던 게 아니라 시청의욕이 좀처럼 일지 않았고 또 너무 피곤했기에 곧 TV를 끄고 잠을 청했다. 그러나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잠은 쉽사리 오질 않아 한참을 뒤척였고, 그 도중 몇 번이고 TV를 몇 번이나 켰다 끄며 [멀홀랜드 드라이브]를 부분적으로, 마치 콜라주 작업을 하듯 보게 되었다. 그게 데이빗 린치와의 첫 만남이었다.
0-2. 영화를 관람한 방식 탓일까, 그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 영화 속 몇몇 장면이 마치 꿈의 일부분처럼 아른거렸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그랬다. 영화를 제대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도서관에 있는 멀티미디어 기기였다. 다행히도 도서관에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DVD가 비치되어 있었고, 이번에는 제정신으로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으며,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혹은 알고 싶지 않은) 매력에 매혹되었다. 그 이후로 그 매력에 이끌려 데이빗 린치의 영화를 한 편씩 찾아보는 중이다.
0-3. 아무튼, 다시 본 감상을 몇 가지 털어놓자면 다음과 같다.
1. 나오미 와츠는 다시 보아도 정말 아름다웠다. 특히 영화의 전반부에서 반듯한 모습의 베티 역으로 등장할 때 그러했다. 이미지가 평범한 듯하면서도 굉장히 독특한 배우다. 가령 그녀는 헐리우드에서 매년 쏟아져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에 자주 출연하는 배우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인상이 좋고 매우 전형적인 금발의 미녀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함께했던 감독 중에는 데이빗 린치, 데이빗 크로넨버그, 피터 잭슨, 미카엘 하네케 등 로맨틱하다기보다는 다소 낯설고 기괴하고 폭력적인 유형의 영화를 찍어내는 이들이 많다. 그 영화 속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이 사실 그렇게까지 기괴하지는 않다는 점, 즉 얌전하거나 아름다운 금발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역할이 많다는 점 또한 특이하다. 밝아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인상을 주는 배우랄까. 차기작은 우디 앨런과 함께 런던에서 찍을 예정이라는데, 어떤 배역으로 나올지 무척 기대된다.
1-1. 로라 해링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나오미 와츠의 블론드와 대비되는 브루넷으로 등장하는데, 일반적으로 블론드가 가장 매력적인(가장 우월한) 여성으로 꼽히곤 한다는 측면에서 이 둘의 관계를 살펴보면 무척 재밌다. 통념이 액면 그대로 적용된 듯하다가 순식간에 역전되니까.
1-2.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게 여겨졌다. 아담 캐셔 역을 맡은 Justin Theroux(어떻게 발음해야 하는지 몰라서...) 역시 배역에 잘 어울렸고, 멋졌다.
2. 꽤 단순명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러 에피소드가 난립하는 듯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 다루는 바는 명백히도 한 인물, 즉 다이안의 꿈과 현실이다. 그 꿈과 현실의 경계 지점은 상당히 직설적으로 제시된다. '꿈은 소원성취'라는 명제를 염두에 둔 채 그 지점 위에 서 보면 하나의 결정적인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 같았다. 이 영화가 난해하다면 그것은 꿈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 꿈을 다룬 방식 때문은 아닐 것이다.
2-1. 이야기를 매번 꿈의 영역에 넘겨버리는 처사는 작가로서 다소 비양심적이고 무책임한 일이 아닐까. 영상언어라는 이름으로 일반적인 언어의 측면에서 결점으로 보이는 몇 가지 부분을 너그럽게 보아주더라도, 데이빗 린치의 어법은 악취미라는 비난을 피할 도리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2-2.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그럼에도 훌륭한 영화로 여겨졌는데, 그나마 어느 정도 수긍 가능한 논리로 그 세계가 지탱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마 꿈의 세계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가장 논리적인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한 사물 속으로 파고들어가듯 카메라를 이동시키고, 시야가 뿌옇게 변할 정도로 극단적인 클로즈업을 하는 등 환상적인 영상기법도 그에 걸맞은 내용에 뒤따른 것으로 여겨졌기에 단순한 기교의 과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3. 친숙한 팝 넘버나 이국적인 곡에 맞추어 가수 혹은 가수를 연기하는 배우가 립싱크하는 장면이 두어 군데 나오는데, 그 장면들은 정말 온몸이 짜릿할 정도로 황홀하고 즐겁게 보았다. 린치의 이러한 키치적인 면모는 정말 사랑스럽다.
4.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원래 [트윈 픽스]처럼 드라마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맛보기 프로그램을 본 방송국 측에서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무마되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카날 플뤼스(Canal+)에서 판권을 사들인 것이 계기가 되어 추가 촬영 및 편집을 거쳐 지금의 영화로 탄생하게 되었다고. 대책 없이 뻗어나가다가 허무한 결말을 제시한 트윈 픽스 마을의 이야기를 상기해보자면 차라리 영화로 만들어진 편이 더 잘된 일인 것 같다; 데이빗 린치가 이 영화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고 화려하게 복귀한 것을 생각해보면,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명제만큼 불변하는 진리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5. 멀홀랜드 드라이브는 미국 LA에 실제로 존재하는 도로 이름이고 영화의 배경도 LA이며 영화 속에는 고층빌딩이나 미국식 간이식당 등 미국적인 문화 요소가 꽤 많이 등장하지만, 그 모든 것이 미국적인 기준에서 오히려 이국적이고 낯설게 여겨졌다. 심지어 헐리우드 사인을 대놓고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음에도 그러했다. 린치는 '초월명상'이라는 것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는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그가 보여주는 미국의 풍경이 낯설게 보이는 것은 내향적인 예술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잘 드러난 하나의 사례로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6-1. 그래도 잘 알려지지 않은 영화가 많이 올라와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편이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같은 영화가 이렇듯 새로 올라오기도 하고, 홍상수나 김기덕처럼 국내에서는 다소 불명예스러운 '예술감독'의 딱지가 붙은 감독의 초기작이 올라와 있기도 하고, 심지어 [잔 다르크의 수난] 같은 무성영화도 몇 편 올라와 있다. 그 모든 영화를 볼 시간과 체력이 부족하다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별점 : ★★★★ (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