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영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아는사람 2009. 8. 16. 14:42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영화제에 별 관심이 없던 시절부터 한 번쯤 가고 싶어했던 행사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음악이 중심이 되어 영화와 공연을 함께 관람할 수 있다는 점이 매혹적으로 다가와서 그랬다. 청풍호에서 열리는 야외공연을 보고, 그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묵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상영작 목록만 몇 번이고 쳐다보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해 출품된 작품이 [원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과적으로는 그때도 그렇고, 그 이후로도 가지 못했다. 여러 가지 부분이 걸렸지만 결정적으로 나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불편한 교통편이었다. 자가용으로는 내가 사는 지역에서 1시간 20분 정도 걸려 비교적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지만, 대중교통으로는 시간도 그 배로 걸리는 데다가 단번에 가는 버스나 기차는 배차간격이 너무 넓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갈아타느라 걸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아서, 결국 장롱면허만 있는 나로서는 그냥 손을 놓아야 했다. 

올해에도 교통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고, 영화제 기간이 수강신청 기간하고 겹치는 터라 또 이번에도 물 건너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수강신청은 그러나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끝났고, 예매율은 예상했던 것보다 그리 높지 않았으며, 상영작 중에 보고 싶은 작품도 꽤 있었다. 부천에 갔을 때 미처 시도해보지 못했던 심야상영에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갔다.

가는 길은 전혀 고생스럽지 않았다. 아버지의 도움을 얻었기 때문. 자식 노는 것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참 여러 생각이 들었고, 굳이 이렇게 부모를 고생시키면서까지 거기에 갈 필요가 있는지 고민하며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면서 살기에 인생은 짧고 나의 머리도 모자란다는 자각이 들었기에 곧 그러한 가책을 거둘 수 있었고, 이것이 아버지와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자그마한 대화라도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고, 에라 모르겠다, 날도 더운데 더 생각하지 말고 그냥 가보자는 생각도 들어서 그냥 가보았다. 

개막식 다음 날, 즉 14일 아침 일찍 가서 15일 아침 6시까지 꼬박 밤을 새우며 6편의 장편 영화, 1편의 중편 영화, 7편의 단편 영화를 보았다. 24시간 동안 그렇게 많은 영화를 본 적은 없었으니 나름대로 신기록을 수립한 셈이다. 주변에서 말하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그 모든 영화 내용이 뒤죽박죽 섞여버렸다거나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실 아침 일찍 일어나 밤새 공부하는 고3 수험생에 비한다면 밤새 영화 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닌 것 같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래도 심야상영 마지막 작품은 작품 자체가 조금 늘어지는 감도 있고 또 굳이 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아서 그냥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대충 보았다.

단편모음선을 제외한 각각의 영화를 본 순서대로 언급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좋아서 만든 다큐
감독 고달우, 김모모 (2009 / 한국)
출연 조준호, 손현, 안복진, 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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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좋아서 만든 다큐]. 저예산 한국음악 다큐멘터리였다. 옛날 TV 화면에나 걸맞은 영상 크기나 다소 열약한 화질 등 기술적인 부분 때문에 극장개봉은 아마 앞으로도 영영 꿈꿀 수 없을 법한, 이러한 영화제에서나 겨우 상영될 수 있을 법한 작품으로 여겨졌고 그만큼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아침부터 기분을 상쾌하고 따스하게 만들어준 영화였다. 

'좋아서 하는 밴드'라는 이름의 밴드는 남녀 각각 2명씩으로 구성된 4인조 밴드다. 서울에서 길거리 공연을 다니며 활동하던 이들은 정말 좋아서 시작한 밴드여서 '좋아서 하는 밴드'가 되었지만, 아무리 좋아서 시작한 일도 계속 하다 보면 좋아서만 할 수는 없는 법이고 그 일을 누군가와 함께 좋아하는 것은 더더욱 힘든 법. 전국 축제를 돌아다니며 겪은 사소하고도 제법 드라마틱한 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좋아서 만든 다큐]가 가슴을 울리는 지점은 바로 그러한 딜레마를 있는 그대로 포용하며 밴드를 지킨 그들이 명확한 해답은 없어도 어쨌든 여전히 유쾌하게 음악을 한다는 결말 부분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첫 단독공연을 보여주는 장면은 정말 좋았다. 

무엇보다도 이들의 음악이 마음에 들어서 좋았다. 유쾌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음정, 노래하는 사람의 진짜 경험이 녹아들어 있는 듯한, 생생하지만 또 그만큼 유머러스한 가사! 보컬의 음색이 가수 이적의 그것과 닮았다고 느꼈는데 영화 후반부에서 그가 좋아하는 뮤지션으로 이적을 꼽는 대목이 나와서 조금 놀라웠다. 그럼 부러 따라 하는 경향도 있는 것일까 싶어서 그랬다.



영화 속에 나온 바로 그 단독공연 실황영상이 있어서 퍼왔다. 출처는 영화를 만든 감독 분의 블로그로 추정되는 곳. '젬베의 노래'는 진지하고 진실해서 좋았고, '딸꾹질'은 애써 밝은 척하는 게 아닌, 정말 해맑은 곡이어서 좋았다. 음반도 나왔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큰 진전이 없다. 


데이비드 진먼의 말러 교향곡 6번
감독 비비아네 브루멘샤인 (2008 / 스위스)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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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말러의 (허접하지만) 열렬한 애호가였고, 그때만큼 자주 듣지는 않아도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작곡가 1순위로 말러를 꼽는 나에게는 올해 제천영화제 상영작 중 [데이비드 진먼의 말러 교향곡 6번]만큼 매력적으로 다가온 작품은 별로 없었다. 예전에 DVD로 이 영상물이 발매되었다는 소식을 풍월당 홈페이지에서 접했던 것 같은데, DVD를 찾아보니 또 없는 것 같다. 음... 

데이비드 진먼은 미국 지휘자이고, 그가 현재 이끌고 있는 악단은 스위스 취리히의 톤 할레 오케스트라이다. 이 오케스트라의 몇몇 단원과 함께 진먼이 말러 교향곡 6번에 관해 악장별로 얘기하는 형식으로 영상물은 구성되어 있다. 말러의 음악만 흘러나오는 부분도 꽤 자주 나오며, 그에 맞추어 오케스트라나 지휘자가 아닌, 도시의 지하철이나 거대한 호숫가의 풍광을 보여주는 영상도 꽤 자주 나오는데 그 부분이 상당히 훌륭하게 여겨졌다. 그러한 영상은 자칫 조잡한 노래방 기계의 영상 수준으로 전락하거나 지나치게 젠체하는 예술적 퍼포먼스로 번질 위험이 있지 않나. 그러한 위험요소를 잘 피해서, 숭고한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어두운 개인의 감성이 결합한 말러 음악에 걸맞은 여러 독특하고도 보편적인 영상을 찾아낸 감독에게 몇 번이고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아쉬웠던 것은 영화 외적인 부분이었다. 극장의 음향시설이 이 다큐멘터리 속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들려주기에는 적합하지 않게 여겨졌다는 것. 오케스트라 전체가 조금이라도 크게 연주하는 부분에서는 어김없이 소리가 깨졌고, 귀가 아플 정도였다. 

관객은 예상했던 것보다 꽤 많았다. 이들이 대부분 말러를 향한 팬심에서 결집한 것인지, 다른 이유에서 왔다면 그 이유가 어떠한 것인지 궁금했다. 굳이 말러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6번 교향곡의 내용, 즉 진먼이 표현한 대로 '철저한 페시미즘'을 담고 있는 이 교향곡은 누구에게나 흥미로울 것 같기는 했는데, 정말 한글 제목처럼 말러의 6번 교향곡만 전적으로 다루기에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다소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데이비드 진먼이 직접 부른 알마에 관한 노래는 정말 즐거운 깜짝 선물이었다. 아래 링크해놓은 것은 그 노래를 다른 사람이 부른 것이다. 다시 들어보니 '오빠는 풍각쟁이야'가 연상된다. '(말러 부인) 알마는 바람둥이야' 정도의 내용. 알마 말러의 사진을 보면 그녀가 대단한 미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데, 그녀가 살아생전 빈에서 뿌린 염문은 정말 대단했다고 한다. 예전에 말러 동호회에서 알마 말러의 남자편력을 화살표 같은 것으로 정리해놓은 ppt 파일을 보고 아연실색했던 기억이 난다.

 


할리우드로 가는 지름길
감독 마르쿠스 미테마이어, 얀 헨릭 슈탈베르크 (2009 / 독일)
출연 얀 헨릭 슈탈베르크, 마르쿠스 미테마이어, 크리스토프 코텐캄프, 마르타 맥고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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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제에서 내가 영화를 선택하는 데 중점을 둔 키워드는 '쌈마이 코미디'였다. 작품성이고 뭐고를 떠나서 [새벽의 황당한 저주]처럼 대책 없이 웃기는 작품이 내가 최고로 재밌게 볼 수는 있는 영화 장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독일의 청년들이 헐리우드에 가서 연예 비지니스에 도전하는 일화를 다룬 블랙코미디라기에 이 영화도 쌈마이 코미디의 범주에 들지 않을까 싶어서 예매했는데, 그 예상은 딱 절반만 들어맞았다.  

이 영화의 문제는 선정성을 주요 모태로 하는 미국 방송을 조롱하려 드는 듯한 이 작품이 오히려 그보다 더 개운치 않다는 데 있다. 우선 입장이 명확히 정리되어 있지가 않다. 극단적인 선정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었다면 그것을 꼬집어서 철저히 비판하던가, 그게 진지하게 비판할 거리가 못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냥 끝까지 가볍게 풍자하던가 해야 했는데  이 영화는 미국문화를 풍자하다가 돌연히 그대로 그것을 따라 하고, 비판하는 듯하다가 자기 자신이 그것보다 더한 괴물이 되어버린다.

미국의 쇼 비즈니스에서 뜨고자 신체절단을 하는 인물은 그래도 B급 무비의 어법으로 보면 얼마든지 너그럽게 보아줄 만하다. 문제는 이러한 신체절단이 지극히 가벼운 조크에서 아무 의미 없이 그저 무겁기만 한 현실로 끝난다는 데 있다. 부실하나마 죽음에 관해 끝없이 얘기한다는 측면에서 철학적 요소가 있다고도 봐줄 수 있겠지만, 그 모든 부실한 얘기가 마지막에는 개똥철학 비슷한 것으로, 어차피 죽는 것인데 조금 일찍 자발적으로 죽는 게 무슨 잘못이냐는 식의 궤변으로 마무리된다. 개인적으로는 그때 영사기에 걸려 있는 필름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러한 발상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그러한 발상으로 그 기나긴 여정을 끝냈다는 게 화가 났다.

영화를 보는 내내 즐거울 것 같았고 실제로도 앞부분에서는 어느 정도 그러했지만 중반 이후에는 정말 괴로웠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는 나의 소심함을 무릅쓰고 이 영화감독을 발라버릴 생각으로, 영화가 끝나갈 무렵 이러저러한 질문을 열심히 머릿속에서 정리했지만, '누가 누구를 발라...' 하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도 카탈로그를 다시 확인해보니 관객과의 대화가 없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 그것을 다 보지 않고 퇴장한 것이 거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감의 표시였다.


베를린 콜링
감독 한네스 슈퇴어 (2008 / 독일)
출연 파울 칼크브레너, 리타 렝기엘, 코리나 하파우치, 아라바 발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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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리우드로 가는 지름길]이 현대 독일영화의 악몽이었다면, [베를린 콜링]은 구운몽이었다(뭐 비유가 이런 식이야,..). 정말 좋았다는 얘기다. 유명한 DJ이자 마약중독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였다. 으레 마약과 관련된 심각한 영화에 결말로 제시되곤 하는 끝없는 절망 대신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 담겨 있어서 좋았고, 그 과정에 상투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인간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면모가 있는 같아서 더욱 좋았다. 이 영화가 나중에 혹시라도 극장에서 개봉한다면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서 볼 용의가 있지만, 내가 데리고 갈 수 있는 아는 사람은 별로 없으므로 별 얘기는 아니다. 어쨌든 [베를린 콜링]은 이 날 내가 본 최고의 영화이기도 했다. 음악도 정말 좋았다. 주연배우 파울 칼크브레너는 꽤 유명한 DJ이자 뮤지션인 모양이다. 크레딧을 보니 다 이 사람이 쓴 곡으로 되어 있었고, 영화가 끝나고 난 다음 어떠한 사람이 '저 사람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뮤지션이다'는 증언을 하는 것을 엿들을 수 있었다.


콘돌리자 구애소동
감독 세바스찬 도거트 (2009 / 미국)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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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마이 코미디' 취향에 부응할 줄 알았던 [헐리우드로 가는 지름길]과 마찬가지로, [콘돌리자 구애소동] 역시 그보다는 덜하지만 어쨌든 실망스럽기는 매한가지인 작품이었다. 가령 이 영화는 정말 쌈마이 코미디를 지향하기는 한다. 실로 조잡한 편집으로 콘돌리자 라이스를 향한 애정을 담아낸 주인공의 모습이 담긴 뮤직비디오는 빈티나서 피식 거리는 웃음을 유발하지만, 딱 그뿐이다. 

마이클 무어 이후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정치 다큐멘터리 대부분이 다 그렇기야 하겠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비판의 초점을 미국 혹은 공화당 지배세력에 맞추었다는 측면, 그리고 그러한 비판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가려 나름대로 애썼다는 점에서 마이클 무어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다. 선구자의 뒤에서 출발하는 이들이 겪는 곤란은 그보다 더 뛰어나거나 그 길을 벗어나 독창적인 무엇을 선보여야 한다는 강박일 텐데, 이 다큐멘터리는 결코 더 뛰어나지는 않지만(편집/영상의 조약함은 예산 탓으로 돌리더라도, 구성/흐름의 껄끄러움은 스스로 탓하는 수밖에 없다) 다만 발상의 측면에서 조금 더 독창적이기는 하다. 이 다큐멘터리는 실제 인물을 실제 자료로 인터뷰했다는 점에서는 진짜지만, 주인공의 콘돌리자를 향한 구애가 설정이라는 점에서는 가짜이기에 꽤 흥미로운 결과물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콘돌리자 구애자의 시선이 콘돌리자 비판자인 이 다큐멘터리 작가의 시선과 좀처럼 적절히 배합되지 못하고 물과 기름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콘돌리자를 사랑하는 청년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 이 다큐멘터리는 결국 그 청년이 콘돌리자를 더 잘 알고자 그녀가 살았던 지역에 가서 그녀를 알고 지낸 이들을 만나서 하는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그 인터뷰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을 듣는 그의 모습은 때로는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치 견학을 온 것처럼 어정쩡하게 보이기도 한다. 즉, 도저히 사랑하는 이에 관해 듣는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연기의 문제라기보다는 연출의 문제로 여겨졌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맹점은 바로 콘돌리자 라이스가 마치 미국 외교정책의 모든 부도덕성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그녀를 매도하는 결말에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를 단두대에서 처형시키면 모든 게 다 좋아질까? 그녀가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고 어쩌면 다큐멘터리에서 감독이 보여준 것보다 더 많은 부분에 책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마녀사냥만으로 미국의 악덕이 없어질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는 그러한 식으로 결론을 내리고야 만다. 

콘돌리자의 참모습을 알게 된 후 그녀를 증오하는 가사가 담긴 헤비메탈 곡을 부르는 주인공의 모습도 너무 상투적으로 다가왔다. 차라리 그 모든 진실을 접하고도 그녀가 있는 곳에 찾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고, 만남조차 거절당하면서도 '그래도 나는 콘돌리자가 좋아,' 하는 식으로 읊조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내는 게 더 멋지지 않았을까? 


울랄라 오디션
감독 소피 블랑빌렝 (2008 / 프랑스)
출연 마리 바스티드, 나탈리 블랑크, 마리 보그, 실비 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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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랑루즈가 태동했던 시기의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듯한 이 영화는, 당시 미국을 순회하던 유랑극단의 단장 정도 되어 보이는 한 미국인이 프랑스에 와서 매력적인 프랑스 여인들을 선발하고자 연 오디션을 가벼운 필치로 그려낸다. 25분이란 짤막한 시간 동안 펼쳐지는 이야기는 제법 유쾌하지만, 그렇게까지 강렬하지는 않았고, 몇몇 대사는 다소 작위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냥 마음 편히 볼 수 있었던 작품.


블루스브레이커
감독 도미니크 브랑귀에르 (2007 / 프랑스)
출연 리샤 보랭제, 로벵송 스테브넹, 알렉스 왈츠, 에스텔 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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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본 심야상영 마지막 작품. 짐 자무시의 [데드 맨]에 레오 까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를 결합시키면 아마 정확히 이 영화 [블루스브레이커]가 나올 것 같았다. 닐 영이 [데드 맨]의 영상에 따라 연주한 인상적인 기타 리프는 [블루스브레이커]의 툭툭 튀는 블루스기타의 리프와 연결되고, [블루스브레이커]의 주연배우는 외모부터 목소리까지 [데드 맨]의 주연배우 조니 뎁과 무척 닮아있다. 그리고 자폐 성향이 있는 청년이라는 주연배우의 캐릭터는 [소년 소녀를 만나다]의 알렉스와 연결되고, 그의 사랑이 별다른 결실을 보지 못한다는 측면에서도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다. 

흑백 영상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이러한 소재를 즐기기도 해서 관심 있게 보기 시작했지만, [데드 맨]과 [소년 소녀를 만나다] 둘 다 그리 박진감 넘치는 영화는 아니듯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여서, 심신이 지친 상태로 집중하기도 힘들었고 그럴 힘도 나중에는 없어졌다. 하지만 나쁜 영화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견문이 그리 넓지 않은 나로서도 그렇듯 여러 영화와 명백히 연결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었을 만큼 다소 진부한 측면이 있었고, 영혼을 울리는 음악 블루스의 짜릿한 면모가 무척 잘 살아나 있음에도 그 모든 것이 다소 둔탁한 인상으로 다가와서 아쉬웠지만, 그것은 아마 내가 졸리고 둔탁한 상태여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해외단편모음1]에는 총 7편의 작품이 묶여 있었다.

유 캔 댄스
감독 마야 맥머너스, 슐로밋 프리드먼 (2008 / 이스라엘)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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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아니, 동독이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에서 이스라엘로 쫓겨나듯 와서 거리로 내몰린 두 유대인 음악가 가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선곡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의 명상 시간도 아니고,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잘 알려진' 곡만 뽑아놓았는지. 거리의 음악가라면 모름지기 그러한 곡을 연주해야겠지만, 진정한 다큐멘터리 작가라면 그러한 생계형 곡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들만의 곡, 혹은 그들만의 연주를 담아냈어야 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러한 곡을 연주하는 이들의 비극성을 조망하거나, 아니면 그 비극성을 넘어서서 활짝 웃고 긍정하는 그들의 정겨운 모습을 보여주거나...
 

카운트다운
감독 조단 캐닝 (2009 / 캐나다)
출연 네일 버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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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있다. 어느 날 콘서트 무대에서 연주하던 중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의 새끼손가락 하나가 굳어서 굽어질 줄을 모른다. 관객의 웅성거림 속에서 그는 연주를 더 이어나갈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콘서트 이후 굳어가는 그의 손가락 개수는 점점 늘어가고, 결국 그는 거지 부랑아 신세가 되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요약하는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한 단편이다. 정말 독특하게 웃긴 단편이었다. 


이별의 멜로디
감독 페드로 모라 (2008 / 포르투갈)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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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하고 진지한 예술가 유형에 관한 심각하고 진지한 접근. 좋은 이야기였고, 그림체나 구성도 나쁘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무엇이 없었다. 가령 연주회 직전 아내가 남편이 잠든 사이 악보를 살펴보고 눈물을 짓다가 거기에 수정(혹은 삭제)을 가하는 부분이 나오지만, 연주회에서는 그러한 부분이 반영되지 않는다. 아마 수정된 부분을 남편이 무대에 오르기 전에 확인하고 바로잡았던 것이겠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을 기대했던 관객으로서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사운드의 시학
감독 잉고 루트로프 (2009 / 독일, 프랑스)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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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심각함과 프랑스의 지루함이 만났다. 무게 잡고 난해한 사운드를 아무 설명 없이 들려주기만 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그럭저럭 괜찮은 것일지 몰라도 하나의 작품으로 그 아이디어를 옮길 때는 그 이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러한 것도 사운드의 시학일 수는 있겠지만, 훌륭한 시학이라는 감상은 들지 않았다.   


천상의 레퀴엠
감독 파블로 알리보트 (2007 / 칠레)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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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자기한 세부묘사, 귀여운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에어기타 대결
감독 네이단 플릿 (2008 / 캐나다)
출연 네이단 플릿, 엠마누엘라 두신, 에이버리 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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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기타 연주는 기타 없이 손과 몸짓으로 기타가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일이다. 이 연주로 아저씨 두 명이 대결을 벌인다고 생각해보라! 두말할 필요 없이 보는 내내 편안히 마음껏 웃으며 본 영화였다.


심벌즈맨
감독 다한 셀라이르 (2008 / 터키)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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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재밌고 좋았다. 드보르작의 9번 '신세계' 교향곡에서 심벌즈의 역할은 지극히 미미하다. 바로 이 심벌즈를 연주하는 심벌즈맨이 객석에 앉은 한 명의 여인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을 음악 형식에 맞추어 담아낸 작품이다. 




제천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심야상영이 끝난 시각은 아침 6시.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나와 햇살을 맞이하니 기분이 묘했다. 찜질방에서 자고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했고, 아침(식사)생각도 별로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미리 표를 끊을 생각으로 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일이 꼬여서 내가 사는 지역으로 바로 가는 버스가 아닌, 내가 사는 지역으로 가는 버스가 많이 다니는 다른 지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고, 제때 내리지 못하는 바람에 이 버스의 종착점인 동서울 버스터미널까지 3시간이나 걸려 가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집까지 오는 버스는 길이 밀려서 평소보다 30분이나 더 걸렸다. 한숨도 못 자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있으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제천까지 갈 때 맑은 몸과 정신으로 편하게 갔던 것이 대비되어 더욱 괴로운 측면도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제천에 가는 길은 어색했지만 그래도 내가 걱정했던 것처럼 불편하지는 않았다. 집에서보다 훨씬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기도 했다. 그래서 그게 꼭 잘한 일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나쁘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교통수단이 개선되기 전까지는, 혹은 내가 제천 근처로 이사 가는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이제 다시 제천에 가면 성을 간다고 집에 돌아온 직후 스스로 선언했지만, 모르는 일이다. 영화를 향한 열정이 올해가 지나고 나면 오래가지 않을 것 않아서 여러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다녀온 것이었고, 청풍호 공연을 못 본 점 등 아쉬운 부분도 있기는 했지만 후회는 없다. 충무로 국제영화제에도 잘하면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잘하면... 

다만 부산까지 가게 될 경우에는 한두 명쯤 동행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리 활발한 성격이 아니고 누군가와 함께하는 데 익숙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무엇이든 홀로 하는 게 편하고 좋지만, 계속 그러한 방식으로 지내다 보니 싫증이 나고 괴로운 측면이 슬슬 부각되는 것 같다. 아직은 홀로 있어서 불편한 측면보다 함께 있으면 불편한 측면이 더 불편하게 다가와서 홀로 다니고는 있지만, 그래도 변화가 있었으면, 그리고 그 변화를 조금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마 부산에도 홀로 가거나 아예 가지 않을 확률이 높으리라 생각되지만...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