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방문기

004. 안성 책마을 : 허름한 동네 헌책방

아는사람 2008. 12. 15. 09:28




 

상호 : 책마을

주소 : 경기도 안성시 금산동 30번지

규모 : 지상 1층. 매우 협소하나 매우 협소하다는 생각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로 협대함. 



제가 사는 고장은 경기도 최남단에 있는 안성시입니다. '안성맞춤'이라는 관용어가 유래한 고장이기도 한데요, 한국에서 3대 시장을 이룰 정도로 중심지였던 시절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자그마한 농촌형 도시일 뿐입니다.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시내가 작고, 그렇다고 해서 시골이라고 하기에는 또 공단지역이 있어서 오염수위가 꽤 높은, 어정쩡한 공간이죠. 


시에서는 '장인의 혼이 살아숨쉬는 문화예술의 도시' 같은 문구를 공문에 사용하면서 열심히 포장에 신경 쓰지만, 포장에만 신경 쓰는 것 같더군요. 영화 <왕의 남자>로 유명해진 남사당 사물놀이패를 위주로, 바우덕이 축제 같은 '문화상품' 몇 가지를 기획해내는 데에서 그칠 뿐 실질적으로 안성에 사는 주민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려는 태도를 찾아보기란 무척 힘들기 때문입니다. 미술관이나 제대로 된 음악회를 볼 수 있는 공간을 기대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고, 극장도 없고, 그나마 한군데 있는 영화관은 그리 쾌적하지 못한 시설과 높은 입장료로 악명이 높죠.


헌책방 역시 문화예술 공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저만의 견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 헌책방 역시 안성에는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던 바는 그러했죠. 평택에 있는 아사달 헌책방을 제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헌책방으로 소개한 이유도, 실제로 그렇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은 그러나 괜히 있는 게 아니겠죠. 이번에 소개할 헌책방은 바로 이 문화예술과 담을 쌓은 고장에 있는 [책마을]이라는 곳입니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곳이 올해 문을 연 곳이라는 데에 있을 겁니다.


[책마을]은 사실 그리 멋진 헌책방은 아닙니다. 파란색 비닐 발이 드리워져 있는 입구에는 다소 허름한 미닫이문이 있는데, 이 미닫이문은 학교 교실 문처럼 투박한 자물쇠로 잠겨 있습니다. 지붕은 다른 건물로부터 빌려온 듯한 각도로 놓여 있는 파란색 양철 지붕이며, 아무런 장식도 없는 하얀색 벽면은 미관상 그리 유쾌하지 못합니다. 내부 역시 쾌적하다고 보기는 힘든 규모입니다. 장서가 많다고 보기도 힘들죠. 어찌 보면 헌책방이라기보다는 예전에 도서대여점이었던 곳에서 재고처리를 하고자 임시방편으로 사용하는 창고 같기도 할 정도입니다. 


장서의 종류 역시 편중이 심한 편입니다. 만화책, 판타지 소설, 무협지 등이 일반 소설이나 에세이집 등과 함께 5:5 비율로 섞여 있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잡지나 문제집 등을 제외하고라면 다른 분야의 서적은 찾기가 힘든 편이죠.

그렇다고 해서 도서대여점이나 어느 헌책방에나 있을 법한 책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장정일 씨나 박찬욱 씨 등 유명 애서가들이 즐겨 언급하곤 하는 '삼중당문고'가 헌책으로 흔히 거래되곤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그동안 그 책을 접하지 못했는데, 이곳에서 처음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고본답게 작고 가볍고, 디자인은 그리 세련되지 않아도 정감이 가는, 괜찮은 책이더군요. 책의 이전 소유자가 연필로 단어 뜻풀이를 상세히 해놓은『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원서 페이퍼백이 진열되어 있기도 했고, 박진영의 에세이집이나『이다의 허접질』등 헌책방에서 흔히 접하지 못했던 흥미로운 책들도 여럿 볼 수 있었습니다.


이곳의 특이한 점은, 평소에는 문을 열지 않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보자면, 주인 분께 전화하면 문이 열리는 곳이죠. 부업 삼아 하는 곳이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저 지나다가 부담 없이 구경할 수 있는 곳이 아닌 만큼, 아무래도 접근이 용이하다고 평하기는 힘들겠죠. 물론 전화를 하면 아주 늦거나 이른 시각이 아닌 이상 15분 내에 문을 열어주시는 것 같습니다.


안성에 거주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면 굳이 방문을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곳만을 위해서 오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실망할 확률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성에 사시는 분이라면 한 번쯤 들러보실 것을 추천합니다. 제가 여태껏 구경한 헌책방 중 가장 규모가 작은 곳이고 또 영업시간도 가장 짧은(?) 곳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쁘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한 번밖에 방문해보지 못했지만 다소 허름한 건물을 본 후 기대치를 낮춘 덕분인지, 개인적으로는 그리 나쁜 인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허름한 동네 헌책방'으로 표현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소박한 공간이지만, 최근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 안성시장님이나, 골프장 짓기에 바빠 산림훼손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시의 졸속행정 등을 고려해보자면, 여러모로 살기 싫고 또 그만큼 믿음이 가지 않는 이 고장에 이러한 헌책방이 있다는 게 자그마한 위안으로 다가오는군요. 구멍가게가 사라지고, 노점상이 철거되는 사회풍속을 고려해보자면 따스한 면마저 느껴지고요. 아무튼 올해 시작한 곳이니만큼, 앞으로도 오랫동안 버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크고 멋진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없을 것 같아 아쉽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