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기타 등등 68

악습관

자신만만한 사람을 뻔뻔한 인간으로 여긴다. 그렇게 보이지 않고자 입과 몸을 꽉 붙들어 맨다. 내면에서 끓어 넘치는 오만가지 것들을 향해 채찍을 휘두른다. 만신창이가 되어 세상을 바라본다. 흑백의 세상을 가로지르는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여인, 그 앞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가 슬며시 뜬다. '사랑은 믿지만, 평화는 믿을 수가 없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어느 것이건 다 믿고, 믿지 않고 성찰하는 이들을 경멸하고, 그들 앞에서 뻔뻔한 인간의 순박한 자신감을 긍정한다.

"사랑하라, 희망없이"

뭘 하든지 내가 겪는 괴로움은 내가 평균 이하이기 때문이라는 자각이 들곤 한다. 나는 엉성한 글조차 완성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개성 있는 옷차림이 아니라 평범한 옷차림조차 따라 입을 능력이 없어서 힘겨워한다. / '88만원 세대의 사랑'에 관한 한겨레21의 기사를 접했다. 사랑은 언제 어디에서나 가난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싶었고, 돈 때문에 헤어질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 아닐까 싶었고, 그렇게 넘겨짚는 나 자신이 한심하게 여겨졌다.

은둔생활

복학신청을 하러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한 3년 만에 찾아간 것이었음에도 알록달록한 예술대학 건물은 친숙하게 다가왔다. 학교에 다닐 생각, 즉 그곳에서 다른 이들과 만나 어울리며 지낼 생각을 하니까 그 친숙함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불현듯 누군가가 강의실에서 공포영화 귀신처럼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정말 두려웠다. 사방을 살펴보며 슬금슬금 행정실로 걸어가서, 절차에 따라 간단한 서류를 채워넣고 전역증을 제출했다. 그게 내가 한 일의 전부였지만 정신이 없었다. 버스에 올라타서 집에 가는 동안 나 자신이 무척 자그마하게 여겨졌다. 내가 걸쳤던 티셔츠는 어제 새로 산 것이었음에도 넝마조각처럼 느껴졌다.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마트에 들렀다. 거기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장..

교차로.

MBC [4주후愛] 시청자 의견 A : 자신을 억누르는 이들의 비극, 말하지 않는 자들의 고통만큼 저의 가슴을 울리는 것은 없습니다. B : 당신이 그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당신이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노약자석 국가는 복지를 담당하기도 하지만 치안을 담당하기도 한다. 노약자는 배려받는 동시에 격리당한다. 구인광고 경력을 요구하지 않는 곳은 없다. 푸드코트에서 홀로 식사하는 일 '이 시끄러운 공간에서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멀티플렉스 팝콘과 음료수를 사는 이들은 대부분 가족이거나 연인이다. 메뉴판에 자그마한 글씨로 씌어 있는 생수를 발견하고 주문하는 이들은 대부분 혼자다. 현대 예술의 타락과 가능성이 뒤섞여 있는 이곳에서 늘 풍기는 팝콘 냄새는 몇몇 이들을 헐벗은 것..

여러 가지.

1. 픽사 애니메이션 [업]이 내일 개봉한다. 보고 싶다. 2. 팀 버튼의 [배트맨 리턴즈]를 보았다. [배트맨]을 워낙 실망스럽게 보았던 터라 조금 불안했지만, 무엇보다도 특수효과가 전편보다 훨씬 세련되어서 만족스럽게 볼 수 있었다; 불과 3년 정도 기간을 사이에 두고 제작된 것인데 왜 그렇게 기술적인 부분에서 큰 차이가 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배트맨 영화 중 이 영화를 최고로 평가하는 몇몇 블로거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러나 이것보다는 [다크 나이트]가 더 마음에 들었고, 그보다는 [배트맨 비긴즈]가 더 좋았다. 그러나 [배트맨 리턴즈]가 가장 훌륭한 배트맨 영화라고 생각되기는 했다. 아,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묻지 말라, 나도 잘 모르겠다... ..

fiction2

소심한 것은 착한 것이 아니야. B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저 억눌린 것뿐이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표현하지 않는 것과 엄연히 다른 일이거든. 어느새 나는 다시금 미소를 짓고 있었다. B는 나의 미소를 무표정한 얼굴로 되받았다. 나는 아주 천천히 미소를 거두고, 그만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권했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차를 기다리며 B는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는 크게 입을 벌리며 하품을 했다. 나는 그의 풀어진 눈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fiction

역 주변은 어두웠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낡은 여관에 들어갔다. 화장실 바닥에는 날파리 같은 것이 기어다니고 있었다. 배가 아팠다. 30대 중반 가량의 여자가 들어왔다. 그 여자는 시종일관 당당했고, 나는 시종일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웃고 싶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웃고 있었다. 그녀는 방을 나서기 전에 자신의 이름이 기쁨이라고 말했다. 나는 기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푹 숙였다.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에는 영혼이 깃들 수도 있겠어. 몸을 씻으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러나 다시 실패할 것이고, 다시 게으름에 굴복할 것이고, 재능을 탓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히게 될 것임을 예감했다. 서커스단에서 자라난 코끼리는 아무리 몸집이 커져도 자신을 묶어놓..

번호이동

3년 반 만에 휴대전화를 바꿨다. 어차피 별 쓰임새 없는 전화여서 그냥 없애버릴까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없애버려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버튼 몇 개가 떨어지려 하는 옛 기기를 뒤로하고 새로 마련한 것은 평범한 슬라이드폰. 최신형은 아니지만 그리 빛바래 보이지는 않는다. 무미건조한 나의 생에 걸맞은 휴대전화인 것 같아 반갑다. 앞으로 2년간 약정의 의무로 묶인 관계이니만큼 잘 해보고 싶다. 험한 손길과 메마른 전파수신을 잘 견뎌내 주기를.